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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안에서 서로 죽이라 하는가”

기사승인 2018.12.05  08: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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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문산책] 척화파-주화파 대립 현장, 남한산성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정녕 전하께서는 칸의 신하가 되시겠습니까?”

   
▲ 황진우 기자

김훈의 소설을 각색한 2017년 개봉작 ‘남한산성’. 연기파 배우 이병헌은 이조판서 최명길로 분해 인조에게 희생을 줄이자며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아뢴다. 주화파(主和派)다. 연극배우 출신 김윤석이 분한 예조판서 김상헌은 유목 기마민족인 여진족의 왕(칸)에게 굴복할 수 없다며 인조에게 싸우자고 외친다. 척화파(斥和派)다.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쓰면 김상헌은 이를 찢고 식음을 전폐하며 울부짖는다. 적의 대군을 앞에 두고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국론이 주화-척화로 분열돼 공방을 펼치던 곳. 결국 청나라에 고개를 숙인 치욕의 역사현장. 남한산성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 김정은 답방이라는 시대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청나라 20만 대군 잠실 주둔하고 항복 요구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부에노스아이레스 G20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서울 답방을 향해 긍정적 메시지를 던진 다음 날인 2일 남한산성을 찾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광주에서 동문을 거쳐 들어가며 웅장하게 솟은 성벽 너머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의 남한산성을 떠올렸다.

12월 1일 청나라 2대 황제 태종(홍타이지)은 수도 심양에서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정벌에 나섰다. 초원의 오랜 숙적 몽골을 복속하고 얻은 3만 병사를 포함한 대군이라 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침공 장계가 조정에 올라온 것이 12일인데 13일에는 평양이 떨어졌고, 14일에는 개성 함락의 장계가 이어졌다.

왕실 가족은 강화도로 긴급 대피하고, 인조는 영서역(구파발)이 점령당하면서 길이 끊겨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1만3천여 병사에 50일 양식이 전부. 명나라에 구원 요청을 보냈지만, 명나라 자체가 흔들리던 시기라 도움이 안 됐다. 지방으로 관리들을 파견했으나 의병 모집도 여의치 않아 고립무원에 빠졌다. 청 태종은 오늘날 잠실 석촌동인 삼전도에 진을 치고 병역을 20만으로 늘린 뒤 항복을 요구했다.

47일간 주화-척화 갈등, 강화도 함락되자 항복

   
▲ 겨울 초입의 남한산성 성벽길. ⓒ 황진우

남한산성 한가운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진퇴양난에 빠진 인조가 머물던 행궁(行宮)으로 갔다. 병자호란 발발 8년 전인 1626년 전란에 대비해 만든 227칸의 대형 별궁이다. 행궁은 불에 타 완전히 무너진 뒤 한때 호텔 등이 들어섰으나 2000년대 들어 발굴에 이어 최근 복원을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극한 대립 속에 인조가 고뇌하던 내행전 대청 등이 고증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새물내 물씬 풍기는 건물이다 보니 인조와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러운 면모는 찾기 어렵다. 12월 14일 남한산성에 들어와 1월 30일까지 47일간 버티던 남한산성. 식량도 떨어졌지만,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돼 왕자와 후궁 등이 청나라 포로가 됐다는 급보가 들어오자 인조는 그 다음 날로 행궁을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다.

수어장대는 1만3천 병사를 독전하던 곳 

행궁에서 나와 인조가 항복하러 간 길을 따라갔다. 원래는 행궁 뒤편 수어장대 옆 서문을 이용해 오늘날 위례 신도시쪽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남한산성 전체 조망을 위해 행궁에서 성남 방향인 남문으로 가는 길을 골랐다. 보수공사중인 남문을 거쳐 왼쪽으로 성남과 송파를 바라보며 가파른 성벽을 20여분 걷자 해발 482m 청량산 정상의 수어장대(守禦將臺)가 나왔다. 남한산성의 군사를 지휘하던 건물이다.

   
▲ 남한산성 남문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 황진우

남한산성에는 군사지휘소인 장대가 5곳 있었지만 지금은 수어장대만 남았다. 처음에는 1층이었는데 영조의 명령으로 2층으로 증축한 뒤, 외부 편액을 수어장대, 내부 편액을 ‘무망루(無忘樓)‘로 이름 붙였다. 청나라에 맞서던 1만3천여 조선군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수어장대 왼쪽에 ‘청량당(淸凉堂)’이 아담하게 섰다. 남한산성 동남쪽 공사를 맡았던 이회가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뒤 부인도 자살하는데, 억울함이 밝혀지자 부부의 넋을 기려 만들었다.

   
▲ 남한산성 서쪽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 ⓒ 황진우

한민족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 왕에 무릎 꿇은 인조 

수어장대를 나와 발걸음을 서문으로 돌렸다. 수어장대에서 서문에 이르는 길은 넓고 평탄하다. 조선 후기 상업 유통로였던 이 길을 따라 서문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멀리 잠실 석촌동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먹구름처럼 새까맣게 진을 친 20만 청군에 견주면 1만3천 조선군은 중과부적이었다. 더구나 보병인 우리와 달리 기마민족인 청나라의 주력은 기병이었다. 애당초 전투력에서 대적할 상황이 아니었다.

   
▲ 수어장대에서 서문으로 이어주는 남한산성 위 옛길. ⓒ 황진우

엄동설한 추위 속에 서문을 열고 삼전도로 간 인조는 1월 30일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 우거왕이 한나라에 패하고, 660년 백제 의자왕이, 668년 고구려 보장왕이 당나라에 패했지만, 적국 왕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항복의례를 치른 것은 반만년 우리 역사에 유일하다.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땅에 찧기를 3번 반복하는 치욕적인 의식이었다. 이후 조선은 1895년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258년간 속국으로 몸을 낮췄다.

   
▲ 남한산성 서문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려고 나간 문이다. ⓒ 황진우

쓸쓸하게 서있는 천민 출신 공신 서흔남 묘비 

서문에서 성벽을 북으로 돌아 북문을 거쳐 다시 행궁이 있는 남한산성 중심부로 돌아왔다. 여기서 동문 방향으로 3백여m 거리에 남한산성 역사관이 자리한다. 웬일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문이 닫혀있다. 남한산성이 사적 57호,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흔적을 간직했기 때문인데 역사관이 방치돼 있어 안타까웠다.

   
▲ 대장장이 출신 서흔남 묘비. ⓒ 황진우

남한산성 역사관 앞 음식점 주차장에는 ‘서흔남 비’가 쓸쓸히 서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에는 병자호란 때 활약한 대장장이 출신 서흔남의 기록이 나온다. 그는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연락병으로 자원해 목숨 걸고 성을 드나들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청나라 군대도 염탐해 보고했으니 ‘간첩’이었다. 그런 활약을 기려 조정은 그에게 정2품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6조판서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천대받은 민중이면서도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니 더 귀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만, 1667년 그가 죽은 해에 세운 비석은 보호각도 없이 식당 주차장 옆에 방치돼 있다. 

청나라 끌려가서도 저항한 3학사 기리는 현절사

서흔남 비가 있는 주차장 건너편에는 현절사(顯節祠)가 있다. 이는 병자호란 때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다 청나라로 끌려가 순국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3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1688년 광주유수 이시백이 세웠으며 숙종이 사액(賜額)을 내렸다. 나중에 척화파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놓았지만 남한산성 역사관처럼 사당 문이 굳게 잠겨, 충절의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다.

   
▲ 3학사 등을 기린 현절사. ⓒ 황진우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이 남긴 문집 <지천집>(遲川集)에는 1637년 2월 철군하던 청군이 무려 50만의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자들은 노예로 팔렸고, 남자들은 심양의 청나라 궁궐 공사에 동원됐다. 속환금(贖還金)을 물고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른다. 여성을 비하하는 ‘화냥년’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볼모로 끌려간 왕자들은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린 뒤 돌아온다. 하지만 현절사의 3학사처럼 끝내 이국 땅에서 충절을 지키거나 모진 고초를 겪다 불귀의 객이 된 사람이 더 많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심양 감옥 해후와 화해

“집에서도 가깝기도 하고 아이에게 사진 찍으려고 나왔습니다. 산에 오르는 게 힘들었을 텐데 불평 없이 따라와 줘서 고마워요.”

경기도 하남시에서 딸과 함께 남한산성을 찾은 이진영(42) 씨가 한마디 덧붙인다. “남한산성 역사도 알려 주려고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 자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래서 길이 남기고 싶은 남한산성 역사는 무엇일까?

척화파의 대표인 예조판서 김상헌은 1641년 72살 고령에 청나라로 끌려가 심양 감옥에 갇힌다. 그가 그토록 반역자라고 지탄한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은 대청(對靑) 외교를 관장하며 영의정으로 승진했지만, 1643년 역시 청나라로 끌려가 심양의 옥에 갇히고 만다. 명나라로 넘어가 항전하던 임경업 장군과 비밀리에 소통한 사실이 발각된 탓이다. 무모한 전쟁에서 백성을 살리고 힘을 키워 후일을 도모하려 했던 최명길의 충정을 김상헌도 심양 적국의 감옥에서 깨닫는다.

   
▲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의 최명길과 김상헌, 인조. ⓒ 네이버

영화 ‘남한산성’이 남북평화 여정에 들려주는 교훈

역시 청나라 심양 감옥에 끌려가 투옥된 척화파로 효종 때 영의정까지 오른 이경여는 김상헌과 최명길의 해후를 직접 보고 ‘두 어른이 백발이 돼 이제야 마음을 원만히 합쳤다’는 기록을 남긴다. 척화도 주화도 다 나라를 구하는 방법론의 차이였음을 오늘에 전해준다.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해 공동번영하려는 평화의 촛불은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외세의 거센 바람 앞에 너무나 위태롭다. 청나라에 무릎 꿇던 조선처럼 자주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조차 국론이 갈려 다투는 ‘남남갈등’의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영화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서로를 죽이라 하는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오수진 기자

황진우 기자 gugu9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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