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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나를 풀어내는 용기

기사승인 2018.11.26  19: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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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압축풀기] 제작기 ② 포항 비손농장 권민제

[여기에 압축풀기]는 내게 자기모순적인 프로젝트였다. 나 자신은 못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시켰기 때문이다. <미로우미디어>를 창업하면서 내세운 것은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소스로 활용하겠다는 거였다. 출연자가 ‘관찰 대상’이 되는 기존 다큐멘터리 방식이 아닌, 출연자 스스로 ‘감독이자 주인공’이 되는 방식이다. 유튜버들처럼 영상을 기획하고 편집할 필요도 없다. 촬영만 해주면 그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맥락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미로우가 ‘나(me)’와 ‘날것 그대로의(raw)’를 합친 말인 것처럼,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출연자들의 용기다.

이를 위해 ‘셀디’라는 장비를 출연자들에게 지급했다. 삼각대나 셀카봉 용도도 있지만, 특장점은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촬영가이드와 촬영미션을 빼곡히 적은 종이 한 장도 건넸다. 집과 일터, 그 밖의 생활공간에서 평소 일상을 담아달라는 내용이었다. 프로젝트 주인공 다섯 명 모두 기대 이상으로 아주 잘해냈는데, 특히 포항 비손농장의 권민제(29) 씨가 찍어준 영상이 좋았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 고된 일을 한 뒤 평상에 누웠을 때 그의 시선에 걸린 비스듬한 풍경 영상은 그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낮고 편안한 목소리로 뱉은 “그냥 이렇게 쉬어요”에서 진짜 날것 그대로 민제 씨의 삶이 보였다.

사실 내가 먼저 내 일상을 촬영해보려고 몇 번 시도했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고 지루한 일상,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지 않은 삶을 드러낼 용기도 없었다. 남들처럼 치열한 대학입시와 버거운 회사생활, 더 나은 직장을 갖기 위한 소모적인 ‘취준’까지, 네모난 책상에 갇혀 살아오고서도 제대로 이룬 게 없다고 느꼈다. ‘압축풀기’라는 주제를 만든 나 자신이 사실 꼭꼭 압축되고 잠겨 있었던 것이다.

   
▲ 영상제작에 마이포브가 제작한 촬영기기 ‘셀디’를 활용했다. ⓒ 마이포브

너희는 자유다! 나도 자유다!

증권회사에서 직장생활하던 어느 날 민제 씨 어머니가 위암에 걸렸다. 토종닭이 먹고 싶다는 어머니를 위해 닭을 찾아 나섰지만, 마당에서 뛰노는 ‘진짜 토종닭’은 없었다. 토종닭이라고 해서 찾아간 곳에는 좁은 철창에 갇혀 사육되는 닭만 있었다. ‘가축은 저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닌데...’ 도시에서 증권회사를 다니며 보아온 직장인들이 그 닭들과 겹쳐 보였다. 철창 속 닭한테서 ‘효율’과 ‘성과’를 위해 네모난 책상에 갇혀 있는 그 자신을 본 것이다. 그때 자유를 향한 불같은 마음이 일었고 퇴근하면 지쳐 쓰러져 잠만 자던 그가 돌연 회사에 사표를 냈다.

‘너희는 자유다! 마음껏 뛰어놀아라!’ 민제 씨는 5년째 넓은 터에 닭들을 풀어놓고 키운다. 그의 비손농장에 사는 닭들은 성장제와 항생제 없이 자라고 알을 낳고 싶을 때 낳는다. 그는 양파, 감자, 옥수수, 토마토 등을 소규모로 재배해 판매하고 농사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부모님, 동생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는데, 일손이 적으니 바쁘고 고된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제 씨는 하루하루 힘든데도 몸과 마음은 나날이 회복되고 있다고 말한다. 생명이 주는 위로와 에너지가 지친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의 가족을 회복시켰다며 밝게 웃었다.

민제 씨는 사료뿐 아니라 풀도 먹고 방울토마토도 먹으며 뛰노는 행복한 닭들에게 그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닭을 키우는 청년농부가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주인공이자 감독이다. 닭장을 치우고 울타리를 고치고 알을 수거하는 사소한 일상을 자신 있게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제대로 ‘압축을 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터이다.

   
▲ 민제 씨가 비손농장에서 닭을 안고 밝게 웃고 있다. ⓒ 이현지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한다’는 격언은 틀렸다. 때로는 집착이라는 ‘무거운 등짐’을 벗어야 길이 보인다.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공채'를 포기했기에 큰 업적을 낼 수 있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뉴스>에서 영상부장을 지낸 이현지 씨가 취업 대신 창업을 택했다. 서울시 지역상생교류센터와 협력 관계를 맺고 ‘상생상회’의 활동상을 알리는 <미로우미디어>를 설립한 것이다. 이화여대 미대 출신이면서 저널리즘을 제대로 배운 그는 자신과 취재원의 압축된 삶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그의 ‘작품’들을 <단비뉴스>에 싣는다. [편집자]

편집 : 반수현 PD

이현지 danbi@danbinews.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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