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고전연구가 이상수 박사
주제: 사관과 기자 - 사마천의 기록정신과 중화주의

사마천의 <사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사기>를 쓴 사마천은 지금 시대의 기자와 닮았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며 의심나는 것을 미뤄 짐작해 쓰지 않고 비워뒀다. 또한 자신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빼지 않고 후대가 확인해 재기록하도록 했다.

고전연구가인 이상수 박사(철학)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사마천의 역사 기록 방법을 통해 기자들이 배울 수 있는 이상적인 취재 방식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사마천이 영웅의 후손을 만나거나 고향으로 직접 찾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역사서를 기록한 <사기>는 기자의 '취재기'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한겨레> 기자로서 학술 등을 담당하며 유난히 학구적이었던 그는 <주역> 등 고전을 연구해 연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동료 기자들을 상대로 <맹자> <중용> 등을 강독하기도 했다. <한겨레>를 자발적으로 그만둔 뒤에는 시민을 상대로 2년간 100회에 걸쳐 <논어> 강독을 했고 지금은 <노자> 강독을 하고 있는 ‘인기강사’다.

▲ 이상수 박사는 지난 9월 20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사관과 기자: 사마천의 기록정신과 중화주의’를 주제로 강연했다. ⓒ 이민호

확실하지 않은 것은 모순되더라도 둘 다 기록

한무제 때 사관이었던 사마천은 아버지 가업을 이어 <사기>를 저술했다. <사기>는 삼황오제부터 한무제 때까지 역사를 담고 있다. <사기>는 총 130권으로 복잡한 사건들을 연대순이 아니라 본기, 세가, 열전 등으로 나눠 기록한 책이다. 천자의 활동을 기록한 게 본기이고, 제후들의 활동을 적은 게 세가, 오랑캐와 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 열전이다. 매우 방대한 내용이지만 사마천의 객관적인 저술 원칙에 따라 쓰여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상수 박사는 “사마천의 <사기>가 전설적인 삼황오제로부터 시작돼 이를 역사로 기록하는 것이 객관적인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며 “그는 불확실한 기록은 불확실한 대로 후대가 확인하도록 내버려 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사마천이 기록한 내용은 훗날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그가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사마천이 기록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다룬 원칙은 '궐의'다. 궐(闕)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고, 의(疑)는 아직 확신이 없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모순된 기록 두 가지를 모두 남기더라도 의심나는 것을 비워두고 억지 추측해서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사마천의 기록 방식인 '궐의'를 '기록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그는 “기록을 할 때 뭐라고 확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내가 확정할 수 없을 때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타난 중화중심주의 세계관의 지도. ⓒ 서울역사박물관

사마천의 중화중심주의는 차별적 세계관

하지만 칼 포퍼가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오류를 남긴다'고 했듯이 사마천의 기록도 오류를 범한다. 세계를 중국 중심으로만 바라보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담긴 것이다. 중화민족이 세계의 중심이고, 나머지 지역은 변방이며, 오랑캐로 표현했다. 이 박사는 “중화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 등 모든 중심주의는 차별적 세계관을 낳았다”며 “우리는 사마천의 우수한 역사 기록 방식은 본받아야 하지만, 잘못된 세계관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양면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 보느냐'에 따라 기사에는 그 기자의 세계관이 담길 수밖에 없다”며 “경계해야 할 것은 지역·성·나라·종교 등 어떤 중심주의든 우리가 열린사회로 가는 것을 막는 요인인 만큼 기자의 세계관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임금 명령도 거부하고 병풍 뒤에 숨어 기록한 조선의 사관

“히틀러가 죽은 뒤 연합국 측에서 성직자, 선생, 언론인, 작가는 직접 나치에 부역하지 않았더라도 '침묵한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들이 소명을 다하지 않고 침묵했을 때 그 침묵은 '동의'를 뜻하게 되는 만큼 그들은 공동체에 전해줄 정보와 이야기를 전하지 않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론을 입법, 행정, 사법 3권분립에 더해 이를 견제하는 제4부로 부르기도 한다. 이 때문에 기자라는 직업은 침묵하면 안되는 것이라고 이 박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을 기자와 빗대며, 기자가 갖춰야 할 소명의식을 강조했다. 태종 때 사관 민인생은 사관의 편전 출입 금지 명령에도, 병풍 뒤에 숨어서까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박사는 “조선시대 사관은 권력을 가진 자, 금력을 가진 자의 잘못을 폭로하려는 기자정신과 맞닿는다”면서 “다만 오늘날 기자의 기사는 매일 발표가 되지만, 사관의 글은 왕이 죽고 난 뒤 공개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사관들은 애처로운 상황에서도 철저한 소명의식을 갖고 권력의 독주를 견제하려 했다”며 “그것에 비하면 지금 언론은 매우 유리한 환경에서 견제 기능을 하기 위한 제4부로서 우리 사회의 감시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 <정종대왕실록>. ⓒ 다음백과사전

“제대로 기록할 용기 없다면 기자 하면 안 돼”

실제 조선왕조실록은 중국의 기록과 비교해도 매우 꼼꼼하고 엄정한 기록이다. 객관적인 기록에 매달렸던 사관들의 노력 덕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해 편찬한 역사가 아니다. 그 때문에 사관들의 업무는 사초를 왕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실제 조선왕조에서 사초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고 전해진다. 실록에는 왕이 사관에게 사초를 보여달라고 하는 내용부터 왕이 말에서 떨어진 것을 기록하려는 사관에게 체면이 안 서니 기록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까지 모두 남아있다. 

이 박사는 “기자는 침묵해서는 안 되고 전달해야 할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라면서 “왕조 시대에도 목숨을 걸고 전달했는데, 지금 기자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다면 기자를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고전연구가 이상수 박사의 책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아큐를 위한 변명>.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운현 이상수 한홍구 정희준 박창식 김필동 장승구 이주헌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안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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