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백성 손에 불타고 일제 손에 시해된 현장

기사승인 2018.11.16  13:27:59

공유
default_news_ad1

- [역사인문산책] 경복궁 답사기

   
▲ 윤종훈 기자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공자가 주나라와 춘추시대 시를 모아 펴낸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끝 구절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곧 ‘개이경복(介爾景福)’에서 따온 이름이 ‘경복궁(景福宮)’이다. 1395년 조선 개국의 으뜸 공신 정도전이 궁을 완성하며 지었다. 개성에서 피바람을 일으키고 왕이 된 이성계는 1394년부터 개경을 떠나 한양에서 정무를 봤다. 이때 1년 만에 서둘러 지은 조선의 첫 정궁 경복궁은 이름만큼 큰 복을 가져왔을까?

미세먼지가 잠시 주춤하던 지난 10일 찾은 푸른 하늘 아래 경복궁은 잔칫날처럼 일견 복이 가득해 보였다. 오색의 한복을 차려입은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볐으니까. 2010년 고증에 따라 제대로 복원한 광화문(光化門)을 지나 표를 끊고, 예의가 일어난다는 흥례문(興禮門) 검표소를 통과해 경복궁에서 가장 큰 건물 근정전(勤政殿) 앞에 섰다.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돌보며 다스리는 전각’이라는 ‘근정전’의 의미를 새기며 되뇐다. 우리는 경복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 경복궁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흥례문 앞에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있다. ⓒ 윤종훈
   
▲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품계석이 도열해 있다. ⓒ 윤종훈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 버린 뒤 백성이 불태워

흔히 조선왕조 518년 역사에서 조선의 왕들이 줄곧 이곳 경복궁에서 정사를 돌본 것으로 오해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파죽지세의 왜군이 아무 방비가 없는 조선군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들이닥치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서둘러 의주로 몽진을 한다.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을 비롯한 한양의 궁궐을 불사른다.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근정전을 비롯해 이성계와 정도전이 꿈꾼 ‘큰 복’의 경복궁은 한 줌 잿더미로 주저앉았다.

노비문서가 보관돼 있던 장예원(掌隸院)도 불태웠으니, 자격 없는 임금 몰아내고 속박 없는 새 세상을 갈망한 조선민중의 항거였다. 경복궁은 1867년 고종 4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275년을 폐허로 남았다. 궁궐로 쓰인 197년보다 잔해 더미로 보낸 기간이 훨씬 길다. 임진왜란 뒤 인조, 숙종, 정조, 영조 등 조선 후기 사극 단골손님들은 경복궁과 무관한 왕들이다.

흥선대원군, 백성의 원성 속에 중건 뒤 실각

1800년 개혁군주인 조선 22대 정조가 창덕궁에서 승하하고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은 왕실 외척의 세도정치라는 암울한 시기로 들어간다. 24대 헌종과 25대 철종을 거치면서 잠시 풍양 조씨 득세도 있었지만, 1863년 26대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왕실의 권위는 안동 김씨 세도 아래 땅에 떨어진 채 부패와 무능으로 치달았다. 12살 고종을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오른 흥선대원군은 왕실 권위 회복을 내세워 경복궁 중건에 나섰다.

당시 조선의 빈약한 재정으로 경복궁 건축은 버거웠다. 비용 조달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반강제 기부금을 받고, 벼슬 팔이도 모자라 당백전(當百錢)이라는 돈을 마구 찍어 경제를 무너뜨렸다. 1866년 화재로 자재가 불탄 뒤에는 사유지 목재를 강탈하고, 백성을 강제 부역으로 끌어냈다. 남사당패와 농악 공연으로 강제노역의 불만을 달래는 게 조정에서 한 일이었다. 1867년 완공했지만, 민심을 잃은 흥선대원군은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23살 며느리 명성황후에 밀려 실각한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경복궁의 역사는 백성과는 악연으로 점철되는 왕실 권위의 상징이란 측면이 강하다.

   
▲ 근정전 내부 단청과 용상. ⓒ 윤종훈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 터에는 기념표석 하나 없어

근정전을 바라보며 왼쪽 회랑의 작은 쪽문으로 빠져나가면 수정전(修政殿)이 나온다. 수정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바로 수정전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세종의 명을 받든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밤을 새워 연구한 끝에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한국 문자 한글은 현존 지구상 문자 가운데, 창제자와 일시, 장소까지 알려진 유일한 문자다.

그러나 수정전 주변 어디에도 한글 창제의 산실임을 알려주는 번듯한 안내문 하나 보이지 않는다. 깨알 같은 글씨의 작은 입식 안내 간판이 전부다. 중국이나 일본, 유럽과 미주 어디에도 자기네 문자를 기릴 장소가 없다. 우리는 유일하게 한글을 기릴 장소가 있는데도 이름마저 집현전이 아닌 후대 중건하며 붙인 수정전을 사용한다. 빈약한 민족정신과 한글 사랑의 밑바닥이 보인다. 이름부터 집현전으로 바꿀 일이다.

수정전은 세종의 과학정신으로도 빛난다. 수정전 서쪽 계단 옆은 세종 때 장영실이 발명한 물시계인 자격루를 세웠던 자리다. 15세기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발명하는 등 과학 한국을 선도한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그 어떤 전시물도 보이지 않는다. 자격루터라는 작은 안내판이 조그맣게 서 있을 뿐이다.

   
▲ 근정전 왼편의 수정전.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 터지만 어떤 기념 시설도 보이지 않는다. ⓒ 윤종훈

연산군의 기생 잔치 열리던 경회루

수정전 뒤를 바라보면 넓은 연못과 수중 누각이 눈에 들어온다. 왕실에서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경회루(慶會樓)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복층 건물인 경회루는 국내에서 가장 큰 누각이다. 경회루하면 이 말이 떠오른다. 흥청망청(興淸亡淸). 흥에 겨워 정신없이 놀거나, 재물을 함부로 써 가산을 탕진하는 일을 빗대는 이 표현은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과 관련 있다.

연산군의 명으로 조선 팔도에서 뽑아온 아름다운 기생을 운평(運平)이라 불렀다. 운평 가운데 더욱 빼어난 기생을 궁궐로 불러들였는데, 이들을 흥청(興淸)이라 이름 지었다. 연산군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악공 광희(狂喜)의 연주에 맞춰 흥청들과 유흥을 즐겼다. 1908년 완성된 <증헌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오는 용어들이다. 연산군의 학정과 유흥은 결국 ‘맑음을 일으키는’ 흥청(興淸)이란 이름 대신 ‘맑음을 망하게’하는 망청(亡淸)의 부메랑이 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 왕이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경회루. 연산군이 이곳에서 흥청들과 유흥을 즐겨 흥청망청이란 말이 나왔다. ⓒ 윤종훈

대원군에게 권력을 준 조대비의 거처 자경전

경회루에서 나와 발길을 근정전 뒤쪽으로 옮긴다. 임진왜란 전 왕이 경복궁에 머물 때 평소 정사를 돌보던 장소는 근정전 바로 뒤에 있는 사정전(思政殿)이었다. 저녁에 휴식을 취하는 침전인 강령전(康寧殿)은 그 뒤에 붙었다. 주안상 들여 한잔 하는 자리가 이곳이다. 강령전 뒤로 가면 이번에는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이 기다린다.

교태전 뒷마당의 이국적 정원인 아미산(峨嵋山, 중국 사천성에 있는 불교성지의 하나에서 따온 이름)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걸어가면 1868년 경복궁 재건 당시 흥선대원군이 공들여 지은 자경전(慈慶殿)이 위용을 뽐낸다. 왕의 공간인 사정전이나 강령전, 중전의 교태전보다 더 큰 이 건물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12살짜리 이명복을 고종으로 앉히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의 지위를 내려 전권을 준 효명세자비(헌종의 모후)인 신정왕후(조대비)거처다. 흥선대원군이 보은 차원에서 가장 크게 지어준 건물이다.

자경전을 돌아 북으로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국립 민속박물관이 보인다. 그 남쪽으로 길옆에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는 향원정(香遠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마치 연꽃처럼 피어올라 있다. 연못인 향원지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낸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 향원지 가운데서 자태를 뽐내는 향원정. ⓒ 문화재청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건청궁

경복궁 안에 있는 전각 중 유일하게 민가 형식이면서 궁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 건청궁(乾淸宮)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처소는 원래 재건 당시 강령전과 교태전이지만, 둘은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건청궁을 짓고 이곳에 살았다. 강령전에 해당하는 왕의 처소 장안당(長安堂), 교태전에 해당하는 왕비의 처소 곤녕합((坤寧閤)으로 이뤄졌다. 멀쩡한 건물을 두고 다시 궁전을 지은 거니까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니다. 이 건청궁에서 반만년 한국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국권 침해 사건이 터진다.

   
▲ 1873년 경복궁 북쪽 향원정 뒤에 지은 건청궁.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았다. ⓒ 윤종훈

1895년 10월 8일. 며느리 명성황후와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한밤중에 나타난다. 오늘날 수도방위사령부격인 훈련대의 1, 2, 3대대장인 이두황, 우범선, 이진호가 뒤따랐다. 그 뒤를 일본도를 찬 일제 낭인들이 굶주린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경복궁을 호위하는 훈련대 총책임자인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이들의 진입을 막다 이미 살해된 뒤다.

잠자던 명성황후는 일제 낭인들 손에 비참하게 끌려 나와 잔인하게 살해됐다. 이때 쓰인 칼은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지금도 보관돼 있다. 일제 낭인들은 아침이 되자 옥호루 앞마당에 방치했던 시신에 석유를 뿌려 근처 녹산에서 태우는 것으로 명성황후 시해 만행을 마무리 짓는다.

   
▲ 건청궁 내부 명성황후 침전인 곤녕합. 오른쪽 끝을 따로 옥호루라 부른다. 일제는 곤녕합에서 잠자던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 윤종훈

친일파의 뿌리인 시해 세력은 부귀영화 누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청나라를 내몰고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자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쓰며 러시아와 손잡는다. 일제는 명성황후 시해를 결정하고 군인 출신 강경파 미우라 공사 주도로 참극을 벌였다. 일제는 명성황후 시해를 조선 내정 갈등으로 몰아가기 위해 권력의 화신인 76살 흥선대원군을 포섭해 앞장세웠다.

왕실 경호를 포기하고 일제에 붙은 3명의 훈련대 대대장들은 일본으로 망명해 잘 살았다. 암살된 2대대장 우범선(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을 제외하면 다시 귀국해 일제 시대까지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렸다. 명성황후 시해 1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나라에 고개를 내미는 친일파의 근원은 이리도 뿌리 깊다.

을미사변 넉 달 뒤 고종은 일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선조에 이어 두 번째로 경복궁을 버린 사건이다. 나라의 운명을 외국 기관에 맡길 만큼 조선의 운명은 종말로 다가서고 있었다. 1년 뒤 독립협회의 거듭된 요청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오지만 덕수궁을 택했다. 이후 조선 왕실은 1910년 멸망할 때까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왕실 권위를 내세운 대원군의 꿈은 고작 29년을 넘기지 못했다.

120여 년 전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아관파천 당시 강대국 패권 다툼 속에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유린당한 역사가 남아있는 경복궁. 지금 한반도와 남북한을 둘러싼 강대국 위주 국제정세와 이 앞에서 빚어지고 있는 국내 갈등은 120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곳곳에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경복궁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으로 남기고 싶어 할까?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임지윤 기자

윤종훈 기자 yoonjh2377@gmail.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