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㉕ ‘온천·목욕문화’의 기원

산중 나무꾼에게 사슴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살려달란다. 불쌍히 여겨 숨기고, 뒤쫓아 온 사냥꾼을 다른 곳으로 보낸다. 사슴은 고마움의 표시로 노총각 나무꾼에게 장가갈 비법을 일러준다.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는데, 날개옷을 감춰두면 올라가지 못하니 아내로 삼으라는 귀띔이다. 요즘으로 치면 범죄인데… 나무꾼 아내가 돼 자식 낳고 살던 선녀. 나무꾼이 감춰둔 날개옷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 뒤 내용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버전으로 갈린다. 나무꾼도 곡절 끝에 올라갔다는 둥… 잠깐 어머니 뵈러 와서 다시 못 올라갔다는 둥… 목욕. 우리 설화에서 선녀가 목욕하던 무대는 금강산 해금강(海金剛) 감호(鑑湖) 연못이다.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성공리에 진행되면 금강산 관광 재개로 감호에서 선녀 목욕의 전설을 되새길 수 있을지… 가을이 깊어가며 목욕과 온천이 제철을 맞는다. 우리네 찜질방과 닮았던 로마의 목욕문화와 그 기원을 들여다본다.

▲ 영국 바스(Bath)의 로마 목욕탕 대욕장 ⓒ 김문환

세네카가 남긴 로마의 목욕탕 풍경…서울의 찜질방 풍경

“목욕탕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소리를 듣는다. 상상해 보라. 근육질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운동한다. 손을 흔들고, 공을 잡고, 큰 숨을 몰아쉬고, 고함치고, 유쾌하지 않은 공기를 내뿜고. 한쪽에선 무기력한 남자가 오일마사지를 받는다. 안마사의 손이 어깨를 주무르고 두드릴 때마다 소리가 난다. 도둑이 들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소리도 들린다. 미용사가 털 뽑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줄 때마다 비명이 울려 퍼진다. 음료 장수, 빵 장수, 소시지 장수, 모두 소리치며 음식을 판다. 주점 주인들은 자기 집 술을 권한다.”

요즘도 이렇게 다양한 시설을 갖춘 목욕탕, 아니 찜질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스포츠 공간, 마사지실, 도둑이 든 탈의실, 수영장, 미용실(면도는 안 함), 먹거리와 음료수를 파는 스낵바, 술집까지… 소크라테스를 존경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기록이다. 냉소적으로 당시 목욕문화를 기록에 남겼겠다. 오늘날까지 석고 데생 시간에 만나는 아그리파 두상. 그 아그리파 장군의 외손녀 소(小) 아그리피나가 아들 네로의 가정교사로 모신 세네카는 결국 황제가 된 네로의 명으로 자결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세네카의 묘사 속 로마 목욕탕을 요즘 볼 수는 없을까?

영어 목욕이란 말의 기원, 영국 로마 목욕탕 도시 바스(Bath)

영국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서부 웨일스 지방 카디프로 가는 도중 나오는 바스로 발길을 옮기자. 이름이 심상치 않다. 바스는 영어로 목욕이니 말이다. 기차역에서 내려 이리저리 물어 20분여 걸어가면 큰 건물이 하나 나온다. 로마 목욕탕(Roman Bath)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거대한 코린트양식 로마 기둥이 사각형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안쪽으로 연두색 목욕물이 넘실댄다. 코는 절로 찡그려진다. 계란 썩는 시큼한 냄새가 나는 유황온천인 탓이다.

바스 로마 목욕탕에서 지금 목욕할 수는 없다. 로마 목욕탕의 모습을 보며 유황온천수를 마실 뿐이다. 온천수를 마시는 것은 질병 치료와 연관돼 바스를 찾는 이들의 주요 관심사다. 로마인이 목욕문화를 배운 그리스에서 목욕은 온천욕이었다. BC 2세기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 시절부터 로마는 물론 지금도 목욕할 수 있는 온천 목욕탕으로 가보자.

아직도 발 담그는 그리스 로마 온천 도시 터키 파묵칼레

한국 단체 관광객과 배낭여행객들의 인기 탐방지. 터키 파묵칼레는 멀리서는 마치 만년설로 보인다. 흰 석회암을 뚫고 흐르는 온천수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며 장관을 이룬다. 바스처럼 온천수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으니 더 즐겁다. 유황천이 아닌 칼슘천이기 때문이다. 파묵칼레는 11세기 멀리 동방에서 온 돌궐(투르크)족의 일파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차지한 뒤 붙인 이름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로 불렸다. 그리스어로 영웅적인 도시라는 의미다. 이슬람화한 투르크 시대에도 온천으로 번성했지만, 1354년 대지진으로 고색창연한 히에라폴리스 건축물은 대부분 파괴돼 흙더미에 덮였다. 오늘날 석회붕 온천수 뒤쪽 로마 도시는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칼 후만(Karl Humann) 덕분에 되살아났다. 그는 히에라폴리스 북쪽 페르가몬 도시 유적도 발굴해 제우스 대제단을 뜯어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으로 가져간 인물로도 이름 높다.

그리스 목욕은 온천 치료 목적, 로마 시대 목욕도 초기에는 치료

그리스인들은 목욕의 치료 효과에 주목했다. 로마인들도 그리스를 배워 처음 화산지대 온천에서 목욕문화를 받아들인 뒤 질병 치료에 목욕문화를 접목했다. 131년 페르가몬 태생 의사 클라우데 갈리에누스(Claude Galienus)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토아 철학자로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그리고 검투사가 더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아들 코모두스 황제 2대에 걸쳐 활약한 그는 목욕의 효용성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물을 이용한 질병 치료에 정통했던 갈리에누스의 효과적인 목욕 원칙을 보자. 요즘도 통할 요법으로 손색없다.

먼저 뜨거운 열기욕으로 땀을 뺀 뒤, 온탕에서 몸을 뻗고 긴장을 풀어준다. 이어 냉탕에 들어갔다 나와 몸을 문질러준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드나드는 것이 좋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데, 질병 예방 효과가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심장 발작을 염려해 병약자들은 피할 것을 권한다. 목욕 뒤에는 피부 관리를 위해 올리브 기름 마사지가 좋다고 봤다. 이런 목욕을 하루에 2∼3번 권했는데…. 직업이 없는 이들만 가능할 일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과 고대 로마인 건강상식이 일맥상통하는 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선 세조가 치료를 위해 온천을 찾아다닌 점,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신혼여행지가 온천이었던 점, 요즘도 어르신들 단골 단체관광지가 온천인 점을 보면 우리도 온천 목욕을 건강과 치료, 휴양으로 가꿔온 셈이다.

카라칼라 황제 목욕탕 1600명,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목욕탕 3000명 동시 목욕

로마 목욕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이탈리아 수도 로마로 가보자. 로마 시대 인기 높던 검투경기장 콜로세움에서 남쪽으로 10분여 걸으면 로마 시대 최대의 관중을 동원하며 인기를 끌었던 도박 스펙터클, 전차경주를 펼치던 경기장 히포드롬(Hippodrome)이 나온다.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다. 여기서 왼쪽으로 10분여 걸어가면 거대한 건물 잔해가 얼핏 괴기스러운 풍경을 선보인다. 카라칼라 황제 목욕탕이다.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착공해 카라칼라 황제 때인 216년 완공한 목욕탕 대욕장 건물은 길이 214m, 폭 110m, 높이가 44m다. 천장은 거대한 궁륭으로 로마 특유의 돔건축 양식이었다. 이렇게 큰 목욕탕에서 몇 명이나 동시에 목욕했을까? 1600명. 이로부터 90여년 뒤인 306년에 완공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목욕탕은 3000명이 동시에 목욕을 즐겼으니 로마 목욕탕의 규모에 새삼 놀란다.

▲ 영국 바스 로마 목욕탕 박물관에 있는 카라칼라 황제 목욕탕 복원도.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면모가 잘 나타난다. ⓒ 김문환

목욕탕 우후죽순, BC 33년 로마에만 170개 

하지만 초기 공화국 시절 로마인들은 목욕을 좋지 않게 여겼다. 인간의 신체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봐 노예의 목욕을 금지할 정도였다. 가정에 목욕탕을 설치할 때는 안 보이는 으슥한 곳에 만들었다. 그러나 금지한다고 수그러드는 문화는 역사를 통해 찾기 어렵다. BC 2세기를 지나면서 상업적인 목욕탕이 생겼다. 인식의 변화와 함께 약간 머리를 쓴 덕이다. 물을 끓여 열탕이나 온탕으로 쓰며 온천 흉내를 내는 방법을 고안해 목욕탕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자 한 살 아래 사위 아그리파가 BC 33년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수도 로마에만 170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이것도 모자라 아그리파는 국영으로 직접 목욕탕을 세웠다. 지중해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목욕문화는 지중해 전역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북아프리카, 오리엔트로 퍼져 나가 지금도 목욕탕 유적이 오롯하다.

로마인에게 목욕은 오후 사교, 대형 목욕탕은 도서관에 강당까지 

로마 시대 목욕은 하루 특히 오후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단순히 몸을 씻는 차원이 아니었다. 로마 시대 목욕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사교의 성격이 컸다. 오전엔 포럼 등에서 공적인 업무를 보고 오후에 즐겼다. 단순히 탕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시설을 만든 이유다. 도서관은 물론이고 강당도 설치해 학술강연도 펼쳤다. 로마 목욕탕과 판박이인 한국 찜질방도 도서관이나 학술 세미나실을 갖추면 폼이 더 날 텐데… 귀는 식초로 닦았고, 이빨을 표백하려 소변으로 닦는 경우도 있었다. 면도는? 목욕탕이 아닌 이발소를 찾았다. 이발소는 늘 만원이었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이 가장 실감 나게 오가는 장소였다. 요즘 동네 미장원 같다고 할까.

▲ 파키스탄 모헨조다로 인더스 문명 목욕탕 대욕장. ⓒ 김문환

목욕의 기원, 인더스 문명 모헨조다로 

인더스 강가로 무대를 옮겨보자. 인더스문명의 중심 인더스강은 인도에 없다.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하며 인도와 분리된 파키스탄에 자리한다. ‘이슬람 도시’라는 의미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나 경제 중심지 카라치에서 비행기로 간다. 육로는 멀고 험하다. 인더스강 바로 옆에 공항이 자리하고, 공항 근처에 인더스 문명의 상징 모헨조다로 유적지가 이따금 찾아오는 탐방객을 맞는다. 그 탐방객이 반가운지 유적지 관리소장 겸 박물관장이 직접 안내하던 17년 전 기억이 새롭다. 모헨조다로 유적지 중심에 BC 2500년 전 하수도를 갖춘 대형 공중목욕탕이 발굴돼 있다. 종교적 성격이 컸다고 가정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목욕탕의 효시다. 유구한 역사의 목욕문화. 로마에서 만개했던 흥미로운 풍속과 에피소드는 다음 기회에 더 다룬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조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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