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지도에서 지워졌던 항일의 도시 제천

▲ 구한말 의병투쟁을 다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 tvN
▲ 황진우 기자

“조선은 왜란, 호란을 겪으면서도 여태껏 살아남았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때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내놓죠. 누가? 민초들이. 그들은 스스로 의병이라고 부르죠.”

지난달 30일 종영한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온 대사다. 영화나 드라마가 종종 가려진 역사에 빛을 비춘다. 최근 ‘안시성’이 고구려의 투쟁사를, 2015년 ‘암살’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대중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였다.

‘미스터 선샤인’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구한말 의병의 역사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일본이 제주 관함식에 욱일기를 고집하며 국민적 공분을 산 터라 메시지의 울림은 더욱 오래 남는다.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만행과 단발령을 강제한 데 맞서 ‘미스터 선샤인’의 대사처럼 민초들이 일어섰다. 그 출발지, 충북 제천에서 의병투쟁의 흔적을 더듬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선 의병 산실 자양영당

지난 19일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 맑게 반짝이던 날, 박달재 동쪽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산기슭의 자양영당(紫陽影堂)을 찾았다. 자양영당은 1895년 춘천에서 내려온 유인석이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병 봉기를 논의한 의병의 산실이다. 비밀리에 거사를 도모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산세가 깊다.

일본 군경을 향해 돌진하는 의병 조각이 인상적인 충혼탑을 지나자,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울린 건물들이 나온다. 성리학자 유중교가 후학 양성을 위해 1889년 세운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유인석이 거사·도모 장소로 썼고, 이후 1906년 유림이 새 건물을 추가하며 자양영당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다.

▲ ‘자양영당’ 앞에는 의병 충절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 황진우

희거나 검은 제의(祭衣)를 차려 입은 행사 관계자들이 분주히 오가더니 일반시민이 가세해 참배객은 금방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전 10시부터 제천의병 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 묘제가 1시간 정도 열렸다. 19일부터 20일까지 펼쳐진 의병 봉기 123주년 기념 ‘제천의병제’ 행사의 하나다.

창의 123주년 기념 ‘제천의병제’ 

묘제는 백 년이 넘어도 스러지지 않고 오히려 거룩한 뜻이 더욱 오롯해지는 의병 정신을 엄숙한 분위기 속에 잘 담아냈다. 끝까지 행사를 지켜본 제천여자중학교 조희정(15) 양은 “TV나 역사책에서 보던 것들을 눈앞에서 봐 신기했고, 제천의병의 역사를 좀 더 느끼는 계기여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천시민 김서연(54·여) 씨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저항한 선조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계기”였다며 “요즘 젊은이들이 제천 국제음악영화제를 잘 알듯이 제천의병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이곳 자양영당을 찾아 민족정신을 익히며 교훈으로 삼으면 좋겠다”며 희망사항을 들려줬다.

제천시민이 전국의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제천의병 전투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제천에 모인 의병의 희생과 제천이 입은 피해는 얼마나 컸을까?

▲ 19일 자양영당 위령묘제에서 제천시민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황진우

제천의병 취재 영국 기자 “제천은 지도에서 싹 지워졌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제천 시내 한가운데 아사봉(현 제천시 중앙공원)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한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완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독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1896년 제천의병 항쟁 뒤 일제 보복으로 파괴된 제천 시내 광경을 전하는 영국 <데일리메일>(Daily Mail) 기자 멕켄지(1869~1931)의 기사다. 제천의병의 기세를 꺾으려고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기사 행간에 잘 묻어난다. 충청 내륙과 강원을 연결하는 내륙 물산의 중심지, 남한강 수운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던 제천은 하루아침에 폐허의 잿더미로 무너져 내렸다. 의병에 협조하는 주민들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토벌 작전이 빚은 비극이었다.

멕켄지 기자의 기사를 비롯해 제천의병과 관련된 자료와 문헌들은 자양영당 옆 ‘제천 의병전시관’에 남았다. 의병들이 사용한 칼 같은 무기류와 유품들이 당시 치열했던 전투 흔적을 간직한 채 탐방객을 맞는다. 전시관 구석에 비치된 방명록에는 ‘할아버지가 의병 활동 하시며 쓰시던 칼을 보고 울컥해 눈물이 났다’는 한 후손 할머니의 글귀가 담겨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 제천시 의병전시관 입구에 조각된 ‘제천의병’. ⓒ 황진우

많은 희생자를 낸 제천의병 격전지 ‘남산 전투’

맥켄지 기자의 기사에서 보듯 무고한 주민들을 향해 잔혹한 보복을 펼칠 만큼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제천의병은 어떻게 활약했을까? 자양영당에서 거사를 모의한 의병은 유인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당시 호서지방(의림지 서쪽 지방, 즉 충청도)의 중심도시이던 충주성을 1896년(고종 33년) 2월 17일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린다. 하지만 조선 시대 남한강 수운의 최대 세곡 보관창고인 가흥창이 자리한 목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수안보 주둔군뿐 아니라 조선 관군과 합세해 3월 5일 총공세를 펼쳐 충주성을 빼앗는다.

의병은 충주에서 제천 남산으로 후퇴해 5월 25일 일제와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유린당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기세는 좋았지만, 군사 수와 장비에서 일제와 관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선두에서 항전을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관 홍사구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장렬하게 순국했다. 창의대장 유인석은 사로잡혀 압송됐다. 제천시가지는 불탔고, 처절한 제천의병 투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의병전시관에 전시된 의병장 유인석의 친필 글씨 ‘위국투쟁’. ⓒ 황진우

제천의병 11분이 잠든 고암동 순국열사묘역

남산전투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순국한 의병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면 제천시 고암동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시내에서 태백선 장락역 건널목을 건너 동쪽으로 800m쯤 가면 산속에 제천의병 홍사구 종사관을 비롯한 11분 애국열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 제천시 고암동 제천의병 추모 묘역. 비석 하나가 기울어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 황진우

순국선열묘역은 제천의병의 뜻을 기리고 애국 충절의 기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1984년 12월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남산 가마골에 있던 7인의 제천의병, 곧 김용주, 김재관, 추성손, 우재봉, 우규하, 박원용, 오문용의 묘를 옮겨왔고, 뒤이어 의병장 김상태와 최욱영의 묘를 이장했다.

2007년 4월에는 모산동에 있던 홍사구 종사관의 묘를 옮겨왔다. 또 의병대장 유인석의 직계 제자로 80 평생을 의병과 애국계몽 활동에 바친 이정규의 묘를 제천시 흑석동에서 이장해 모두 11분의 순국열사를 모신 현재 모습을 갖췄다.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은 묘역이 시내 중심지는 물론 도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다. 시민들이 의병과 애국열사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접근하기 좋아야 하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가뜩이나 진입로의 폭도 좁은데 19일에는 의병추모 행사 기간인데도 하수도 공사를 벌여 의병추모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보였다.

▲ 순국선열묘역에 자리한 제천의병 홍사구 종사관의 묘. ⓒ 황진우

‘미스터 선샤인’이 전하는 ‘자주독립’ 의병 정신의 의미

1995년 제천의병 창의 100주년을 기념해 시작한 제천의병제는 제천시민들 스스로 의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든 추모 행사였다. 선조들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구한말 의병 활동에서 보듯 나라가 위태로울수록 자주독립의 기치를 들어올렸다.

오늘날 남북이 갈려 대립하지만, 우리 민족은 수천 년 역사에서 스스로 민족혼과 나라를 지켜왔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갈등하던 남과 북이 평화정착과 공동번영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주변 강대국들은 자기들 관점과 이익을 기초로 남북 문제와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개입한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 남북이 함께 가야 할 미래가 ‘미스터 선샤인’의 대사 한 토막에 살아 숨쉰다.

“우리 의병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무기가 별로 없소. 총포는 너무 낡아서 불발이 많고 총알은 거의 다 떨어졌소. 알고 있소. 이렇게 싸우다 결국 죽겠지... 허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소.”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조현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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