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키 큰 나무와 화려한 장미가 아니어도

기사승인 2018.10.18  15:53:44

공유
default_news_ad1

- [단비인터뷰] 심리치료극 개척자 최헌진 생명굿연구원장

“다람쥐, 부엉이, 호랑이, 패랭이꽃 등 수많은 것들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평생 사슴으로 살다가 죽어요. 이 시대가 원하는 사람, 역할로 살다가 자기가 생명력이 있는지 모르고 의심도 안 해 보고 말이죠.”

학벌, 재산, 외모 등 획일화한 기준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경향이 유독 심한 한국 사회는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움츠리게 만든다. 이런 위축과 다양한 관계에서 오는 상처는 종종 마음의 병으로 이어진다. 심리치료 기법인 사이코드라마(심리극)를 국내에 정착시킨 후 전통 무속인 ‘굿’을 마음치료에 접목하고 있는 최헌진(73) 생명굿연구원장을 지난 5월 24일 대전 둔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고 지난 16일 이메일로 추가 인터뷰했다.

국내 사이코드라마 토대 닦고 ‘생명굿’ 개척 

최 원장은 대전 을지대학교병원에서 정신과 교수로 일하던 시절(1984~1997) 우리나라 사이코드라마의 토대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5년 대전을지병원에 국내 최초 사이코드라마 정규교육과정을 만들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사이코드라마의 토대(1997)> 등 여러 권의 책과 논문도 펴냈다. 그러다 2012년에 돌연 새로운 심리치료 기법인 ‘생명굿’을 고안하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 대전의 한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만난 최헌진 원장. ⓒ 박경민

청바지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백발의 최 원장은 첫눈에 ‘보통 사람이 아니겠다’는 인상을 주었다. 과연, 그는 전국중고등연극제에서 4년 연속 연기상을 받을 정도로 예술적 관심과 감수성이 풍부했지만, 아버지의 기대 때문에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사람이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은 대학에서도 꺾이지 않아, 의대생 최초로 서울대 총연극회장을 맡았다고 한다. 연극하느라 전공 공부는 순조롭지 않아서, 6년 과정을 마치는 데 9년이 걸렸다.

서울을지병원에서 인턴(수련의)을 하던 1979년, 그는 정신과 병동에서 사이코드라마를 한다는 공고를 우연히 보고 몇 번 구경 갔다가 ‘정신과 레지던트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결국 서울 순천향대병원에서 정신과 레지던트(전공의)로 일하게 됐다. 그 병원에서 혼자 사이코드라마를 시도하고 있던 유석진 신경정신과 주임교수(2008년 별세)가 그에게 일을 맡겼다.

“고 유석진 교수도 사이코드라마의 원조인 미국 모레노 연구소에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였고, 나도 사이코드라마를 어깨너머로 본 것밖에 없어서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레지던트로 일하느라 바빴지만 시간을 쪼개 정신의학, 분석심리학 등을 공부하고 라깡, 융, 프로이트, 니체, 들뢰즈같은 철학자에게도 빠져들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니 사이코드라마에 흥미와 자신이 생기더라고 한다. 그는 당시 틈만 나면 밤 12시에도 환자를 두세 명씩 모아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했다. 그리고 대전 을지병원에 정신과 교수로 부임한 후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청소년상담사들과 간호사, 수련의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이후 ‘사이코드라마연구회’와 ‘한국사이코드라마학회’를 창립했다. 그는 관련 연구를 위해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고, 사이코드라마 창시자인 제이콥 레비 모레노의 아내 제르카 모레노가 운영하는 미국 연구소에 한 달간 머물며 공부하기도 했다.

북, 장구, 꽹과리 등 ‘우리 것’ 접목

그는 자신이 만들고 공들여 키워온 사이코드라마학회를 지난 2012년 탈퇴했다. 심리극을 이끄는 ‘사이코드라마 디렉터’ 자격증을 실력 있는 소수에게만 주자고 고집했지만, 대다수 회원들이 '웬만큼 진행할 줄 알면 주자'고 맞섰기 때문이다. 최 원장은 “외국에선 1000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기준이 낮고 자격 취득 후에도 전문가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한다”고 성토했다. 학회마다 발급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국내 사이코드라마 전문가 자격시험은 150~40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응시할 수 있다.

그는 “사이코드라마를 떠나 생명굿을 개척한 것은 해외에서 들여온 드라마형식에서 벗어나 ‘우리 것’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생명굿은 우리 민족의 원형연극인 굿의 형식을 빌려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다. 서양의 카니발이나 페스티벌처럼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신나게 놀면서 계급과 체면, 형식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된 생명의 맛’을 느끼자는 취지다.

   
▲ 최헌진 원장과 함께 한바탕 생명굿을 벌인 뒤 서로 끌어안고 인사하는 사람들. © 생명굿연구원

생명굿에는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 대신 ‘알’이, ‘디렉터’대신 ‘알님지기’가 등장한다. ‘알’이란 알곡식, 알몸, 알토란처럼 ‘치장하지 않은 순수한 존재’를 일컫는다. 알님지기는 굿판의 흐름을 이끌면서 알이 속내를 터놓을 수 있게 돕는 사람이다. 굿을 차용한 만큼 사이코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북, 장구, 꽹과리, 촛불 등 한국적 장치가 곳곳에 배치된다. 촛불은 저세상으로 간 사람과의 갈등을 회상할 때, 북 같은 타악기는 울분을 토하거나 큰 소리를 내지를 때 보조적인 도구로 쓰인다.

주인공이 울고 소리 지르며 아픔을 토로하는 동안 관객들은 서로서로 휴지를 건네느라 바쁘다. 사연이 안타까워서, 자기 상처와 닮아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어깨를 들썩인다. 3~5시간 정도 진행되는 굿판 한 마당이 끝나면 관객들은 주인공과 소감을 나눈다. 굿을 본 느낌, 자신의 경험담, 조언 등을 건넨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 같이 노래하고 춤춘다.

“제의(굿판)는 잡초 한 포기, 강아지 한 마리, 폐병 환자, 몸 파는 여자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순간입니다.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는 곳이죠.”

사회가 만든 기준 때문에 열등감 느끼지 말라

최 원장은 생명굿 마당을 열 때 무대에 나온 주인공 이름과 직업을 절대 묻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적인 신분을 떠나 사람 자체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최 원장의 생명굿연구원은 이런 굿판을 이끌 수 있는 생명굿수행자 자격증을 가급적 1000시간 가량 집중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발급하기로 했다. 최 원장의 개입 없이 두 마당을 끝내면 합격인데, 아직 통과한 사람은 없고 4명이 준비 중이다. 최 원장은 “빨리빨리 배출하고 싶지만 남한테 내놓고 부끄럽진 않아야 한다”며 “생명굿은 1000시간을 공부해도 (알님지기로서) 부족하다”고 말했다.

   
▲ 생명굿 마당에는 주인공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술이 등장하기도 한다. © 생명굿연구원

최 원장은 생명굿이 사이코드라마와 닮은 부분이 있지만, ‘역할놀이’에 머무르는 사이코드라마와 달리 ‘나를 버리기’ ‘나에게서 벗어나기’를 시도하기 때문에 마음에 쌓인 한(恨)을 터뜨리는 데 훨씬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인공의) 심리문제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각자 마음의 어려움을 가지고 춤을 만들고 하나의 멋진 신화를 만들고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생명굿판”이라고 덧붙였다.

생명굿이 끝나면 그는 가끔 주인공에게 북을 치며 자기 삶을 전설처럼 얘기해보라고 시킨다. ‘옛날 강원도 산골에서 몇째 딸로 태어났는디~’하는 식이다. 이 작업을 거치고 나면, 주인공은 힘든 일에 부닥칠 때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최 원장은 "일반적인 심리치료가 상담받는 이의 ‘단점’과 ‘열등감’을 인정하고 극복하라는 취지로 이뤄지지만, 단점이나 열등감이란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의해 세뇌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생겨야 잘 생긴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보다 열등하다’ 등의 기준은 사회가 만든 것일 뿐 진리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생명굿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우리는 각자 생긴 대로 귀하며,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면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못생겼다, 미련하다, 공부 못한다 등의 관념은 사회에서 주입된 것이죠. 공부 못하면 사람이 아닙니까? 예쁘다는 기준은 도대체 뭔가요...‘인간은 이래야 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잡초는 잡초답게 각자 다 멋있게 어울려서 살면 되는 거죠. 왜 모두가 큰 키의 나무가 돼야하고 화려한 장미가 돼야 하나요?”


편집 : 이자영 기자

박경민 기자 bkminrudals@naver.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