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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서로 막힘 없이 돌보는 마음을 담다

기사승인 2018.10.14  11: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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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역사책방’서 ‘한글이 걸어온 길’ 전시회

경복궁 서쪽 통의동에 있는 ‘영추문 앞 역사책방’. 문을 연 지 다섯 달이 채 안 된 역사책방은 한글날을 전후해 평화박물관(이사 한홍구)과 함께 ‘한글이 걸어온 길’이라는 주제로 10월 3일부터 23일까지 21일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세종대왕에서 주시경까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학자들의 한글 연구’, ‘미 군정 시절 한글교본’, ‘북으로 간 한글학자’, ‘한국전쟁 후 한글의 발전’, ‘초기의 한글사전’ 등 6부로 열린다.

   
▲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영추문 앞 역사책방’은 한글 역사 연구에 필요한 기록물들을 10월 23일까지 전시한다. ⓒ 윤종훈

이 전시에는 해방 직후 조선어연구회가 복간한 <훈민정음 해례본>,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15년 시천교가 간행한 경전 <시의경교>, 1914년 김두봉이 만든 사전의 바탕이 된 문법책 <조선말본>, 조선 중기에 간행된 일본어 학습서 <첩해신어>, 월북한 한글학자 유열이 쓴 <알기 쉬운 한글강좌>, 조선어학회가 지은 <조선말 큰사전> 등이 공개됐다.

‘조선어학회사건’, ‘브나로드운동’ 등으로 헤쳐온 한글 역사

   
▲ 역사책방 벽면에는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1931~1934년 네 번에 걸쳐 벌인 ‘브나로드운동’ 포스터가 소개됐다.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를 뜻하는 러시아 말로 당시 농민들에게 한글을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열렸다. ⓒ 윤종훈

한글날이 만들어진 데는 학술연구단체 ‘조선어연구회’의 공이 있었다. 1921년 장지연, 이윤재, 최현배 등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는 한글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전국 주요 도시 10여 곳에서 월례발표회를 개최하고 중소 도시에서는 교양강좌를 열어 우리 말과 글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보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1926년에 ‘가갸날(한글날의 옛 이름)’을 제정하면서 기념행사를 갖도록 하여 한글 보급과 대중화에 기여했다.

1931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사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만드는 등 우리말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는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면서 관계 인사들이 구속되고 고문을 받았다. 이때 작성한 원고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 경찰에 압수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면서 관련 인사들이 풀려나고 그해 9월 경성역 조선통운창고에서 원고를 발견했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한글학회는 1947년에 <조선말 큰사전> 2권을 간행했고, 3권부터는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1957년까지 6권을 간행했다. 우리 한글이 지나온 역사는 파란만장한 격변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ㄱ~ㅎ 순으로 정리된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1, 2권>과 ‘한글학회’의 <큰사전> 3~6권, 그리고 ‘조선어학회’를 창립한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등이 전시돼 있다. ⓒ 윤종훈
   
▲ <훈민정음 해례본> 인쇄판의 모형. ⓒ 윤종훈
   
▲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 윤종훈

<독립신문>, 오늘날 한글 만들어지는 데 큰 구실

역사 전문 서점 ‘영추문 앞 역사책방’을 운영하는 백영란 대표는 “한글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 같은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면서 공부해보니까 남과 북이 약간 차이만 있을 뿐 한글말을 다르지 않게 쓰는 모습을 알게 됐다”며 “남한에는 최현배 선생, 북한은 김두봉 선생이 한글을 정비하고 보급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쉽게 한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많은 사람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1933년 신명균이 간행한 <주시경선생유고>. ⓒ 윤종훈
   
▲ (왼쪽) 주시경 선생이 한글 교육을 마친 수강생에게 준 증서인 ‘맞힌보람’. (오른쪽) 풀어쓰기를 기존의 모아쓰기와 혼용하자고 제안한 ‘한글 흘림체 교본’. ⓒ 윤종훈

백 대표는 “주시경 선생님과 제자들이 만든 <독립신문>이 한글 연구의 주류를 형성하는데 큰 구실을 했다”고 강조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주시경 등이 창간했다. 모두 4면인데 3면은 한글, 1면은 영문이었고, 당시에는 획기적인 한글전용에 띄어쓰기를 하고 마침표를 사용했다. <독립신문>은 처음으로 본격적인 논설문을 한글로 썼다는 점, 주시경과 그 제자들의 집결지란 점에서 한글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림과 한글이 어우러진 ‘딱지본’과 ‘육전소설’

   
▲ (왼쪽부터) <유충렬전>과 <사씨남정기>. ⓒ 윤종훈

한글이 걸어온 역사를 알리기 위한 전시회지만 무겁고 어려운 역사 기록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글소설 <유충렬전>과 <사씨남정기>처럼 1910년대부터 소설의 계몽성은 약화하고 오락성과 대중성을 노리면서 등장한 일명 ‘딱지본’도 눈길을 끌었다. 당시 표지가 알록달록한 것이 딱지 같다 하여 ‘딱지본’이라 불렸고, 국수 한 그릇 값인 6전에 팔렸다 하여 ‘육전소설’이라고도 했다.

   
▲ 세종 16년인 1434년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과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담아 간행한 <삼강행실도>. ⓒ 윤종훈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과 한글 설명을 달아 간행된 <삼강행실도>도 흥미로운 기록물 중 하나다. <삼강행실도>를 만든 당시 조선은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기에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부인 사이에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인 삼강(三綱)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백성에게 유교의 생활윤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한글 창제의 정당성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당시의 통치 이념과 실천윤리를 강조한 것이긴 하지만, 한글의 역사에는 소통과 배려의 정신, 곧 ‘서로 뜻을 전하는 데 막힘이 없고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었다.


편집 : 이민호 기자

윤종훈 기자 yoonjh23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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