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국가공무원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
직렬: 일반행정, 지역: 전국, 최○○ 4000XX59

친구에게 

150:1의 경쟁률을 이겨냈구나. 축하한다. 지금 노량진에 있을 너는 어떤 심정일까? 새벽에 소식을 듣고,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쓴다. 너와 함께 명절 특강을 들으러 새벽 5시부터 줄을 서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마냥 집을 떠나고 싶고, 엄마 잔소리가 귀찮게 느껴져서 너의 고시원 단칸방을 부러워했었지. 너는 노량진을 ‘섬’이라고 불렀지. 지하철이 번듯하게 깔려 있지만 너는 차마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주말 저녁 함께 사육신 공원에 올라가 맥주를 마시던 게 기억난다. 꽉 막힌 듯 답답한 학원가에서 숨구멍 같은 곳이었어. 63빌딩과 아파트 숲을 바라보면서 “저런 아파트에 살아보는 날이 올까?”라며 허탈하게 웃던 우리가 생각나는구나. 시험에 나란히 탈락하고 상심해 있을 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지. 노량진 섬을 벗어나 광화문에 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에 쏟아져 나와 행진하고 있었다. 도로를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네가 생각난다. 너의 의협심이 없었다면 집과 노량진 학원만 오가는 마음의 감옥에 머물러 있었을 거야.

▲ 지금은 없어진 노량진 육교, 공시생에게 노량진은 마치 섬과 같은 곳이 되었다. Ⓒ 이민호

다시 시험에 낙방하고 독서실 자리를 정리하는 나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리던 네 모습이 생각난다. 나는 사방이 막힌 책상에서, 걸음마다 학원인 거리에서, 다른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한국이 지긋지긋했다. 그 무렵 서정주 시인의 ‘추천사’를 읊조리곤 했지.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그네를 타고 하늘로 내닫듯이 나는 지금 이탈리아 피렌체에 와있어. 취업은 포기했고. 오늘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상을 봤어. 학원 건물만큼 키가 커 보이는 거인을 마주쳤을 때 느낀 그 압도적인 감각을 잊을 수가 없어. 다리와 몸통의 부분부분이 모두 정교하게 다듬어진 이 석상은 인간의 몸을 닮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듯했어. 세상에 아무리 몸을 잘 가꾼 몸짱도 다비드 상처럼 몸을 만들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건 신을 형상화한 거구나 했지.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사진은 원본 주형 레플리카 전시품이다. Ⓒ 이민호

놀라운 경험이 자꾸 쌓이고 있어. 이곳의 물질적 조건이 모두 나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지. 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그렇고, 식당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도 그렇고, 만년설이 날리는 마터호른 산자락의 웅장한 풍경까지 모두 나를 바꿔놓고 있어. 삶의 모든 조건이 달라지자, 다른 차원과 시간 속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익숙한 사물과 공간을 벗어나고 나서야 마음의 감옥도 탈출할 수 있었어. 그런데 사방이 막힌 책상을 벗어나 찾고자 했던 게 이런 걸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오늘은 너와 함께하던 그때가 그립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한 그때인데 말이야. 한국의 모든 것을 잊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물질과 공간은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지만, 너와 함께한 그 시간은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겠니.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 내가 사랑하지만 떠나고자 발버둥친 그 시간 말이야. 그래도 그곳에 돌아가진 않을 거야.  

친구야, 꼭 원하던 바를 이루기 바래. 노량진을 벗어나 새로운 시간을 살게 되면 또 다른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제 한동안 연락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어디로 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니 답장할 생각은 하지 마. 다시 연락이 닿을 때까지 행복하렴. 어쩌면 나도 새로운 시간 어디쯤에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

너를 그리워하는 친구가.


편집 : 안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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