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강화도

▲ 윤종훈 기자

‘만길이나 높은 곳에 현모한 단을 쌓았는데 하늘까지 닿았고 가벼운 바람에 맑은 아지랑이는 그윽한 정을 끌어 올리네. 아득히 앉아서 초파리떼를 헤아리니 우리 강토가 눈앞에 질펀하구나.’ (참성단 안내표지판 서영보 시문)

‘하늘까지 닿았다’고 옛 시인이 읊조린 마니산 참성단(塹星壇) 오르는 날. 하늘은 처음 열린 것처럼 쪽빛으로 빛난다.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은 데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이마에 구슬땀이 맺힌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시인의 표현대로 ‘가벼운 산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가슴까지 식혀준다. 정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푸르른 하늘 아래 비옥한 강화의 옅은 금빛 초가을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단군이 쌓았다는 참성단이 왜 섬에 있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터전이 혹시 강화 벌판은 아니었을까? 단군이 쌓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참성단도 이곳에 있으니 말이다. 단군이냐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냐, 설이 다르지만, B.C 2333년 단군이 나라를 연 것으로 치면 올해는 단기 4351년. 개천절을 맞아 단군의 자취를 좇아 강화도 문화유산을 둘러봤다. 강화는 한민족의 상서로운 출발을 알리는 동시에 민족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반만년 민족사에 강화에서는 어떤 역사가 펼쳐졌고, 어떤 유적이 그 상흔을 간직하고 있을까?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 ⓒ 강화군청

잔칫상에 절편을 고이듯 돌을 반듯하고 얇게 잘라 켜켜이 올린 참성단. 돌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는 풍습은 유라시아 기마민족의 전통이자 풍습이다. 대개는 단이 둥글다, 우리의 서낭당이 그렇듯. 마니산 정상의 사적 136호 참성단은 다르다. 제단의 기초는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그 위는 땅을 상징해 네모다. 둥근 단의 지름은 8.7m, 네모난 단은 6.6m다. 고려 시대 제사 지내는 재궁(齋宮)을 두고, 대언(代言: 왕명 하달 승지)을 보내 초제(醮祭: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점, 조선 세종 12년인 1430년 2품의 고위 관리를 보내 초제를 올린 점으로 미뤄 참성단은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존재한 역사유적임이 틀림없다.

▲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의 상방단. ⓒ 윤종훈
▲ 참성단의 단군 유적 표지판. ⓒ 윤종훈

애초 광활한 만주 벌판이나 한반도 평야지대에 하늘을 섬기는 참성단을 만들 일이지, 왜 작은 섬에다 쌓았을까? 의구심은 참성단에 올라 발아래 강화벌을 바라보는 순간 풀린다. 드넓게 펼쳐지는 들판과 바다는 능히 한 나라를 일구고도 남을 만큼 넉넉해 보인다. 선사 농경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강화도에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일구며 그 자취를 남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우리 민족이 널리 이롭게(弘益) 살고 있는지 반문하며 참성단을 내려와 선사시대 유적지로 간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있는 한반도의 ‘대표 고인돌’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로 발길을 옮기자 멀리 얼핏 기와집처럼 보이는 거대한 돌 구조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적 137호 지석묘(支石墓)다. 해발 30m의 야트막한 야산 능선 위에 우뚝 솟았다. 생김새를 뜯어보면 두 개의 거대한 고임돌(지석) 위에, 길이 6.40m, 너비 5.23m, 두께 1.34m, 무게 53톤짜리 거대한 덮개돌이 얹혔다. 탁자처럼 생겨 탁자식 고인돌이라 불린다. 2010년 전라도 고창·화순 지역 고인돌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지구촌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찾아오는 문화유산인 고인돌은 규모에서 보듯 선사 농경사회 권력자나 하늘과 소통하는 종교지도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지석묘). 상석과 2개의 지석으로 된 탁자식 고인돌이다. ⓒ 윤종훈

북방식이라 불리기도 하는 탁자식 고인돌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흙으로 바닥을 단단히 다진 뒤, 받침돌을 좌우에 세우고 묘실을 만든다. 시신을 묘실 땅 위에 안치하고 부장품을 넣는다. 매장이 아니다. 이어 막음돌(폐쇄석)로 묘실 양쪽을 차단해 짐승의 접근이나 도굴을 막는다. 지금은 양 끝 막음돌이 없어져 묘실이 통로처럼 뻥 뚫린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고인돌 왕국이라 불린다. 강화도 고인돌은 부근리 14기를 포함해 모두 70여 기다. 남한 전체에는 3만여 기, 남북을 합쳐 4만5천여 기의 고인돌이 위용을 뽐낸다. 프랑스부터 한반도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퍼진 세계 고인돌의 반이 넘는다. 좀 더 세련된 고분문화로 진화가 늦어진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일찍부터 이 땅에 농사문명을 꽃피운 집단이 거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몽골에 대항해 피난 온 고려의 수도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가 강화읍내를 둘러본다. 먼저, 질문 하나. 우리 역사에서 수도였던 도시들은 어디일까? 고구려 평양, 신라 경주, 백제 서울·공주·부여, 고려 개성, 조선 서울. 대개 여기서 그치는데 강화가 빠졌다. 우리 역사에서 강화도는 엄연히 도읍의 위치를 확고히 차지한다. 강화읍 관청리 사적 133호 고려궁지가 그 무대다. 고려가 개성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긴 사연은 이렇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몽골의 기세에 1216년 거란족이 고려 영내로 쫓겨 온다. 고려는 몽골과 손잡고 1218년 이를 토벌한다. 문제는 그 뒤였다. 몽골의 고압적 자세에다 각종 공물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던 중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하다 압록강 변에서 피살된다. 고려에 책임이 있다고 본 몽골은 복수를 다짐했고, 1229년 2대 칸 오고타이가 즉위한 뒤 1231년 고려에 1차 침공을 단행한다. 처인성(용인)에서 승려장수 김윤후가 몽골 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하면서 간신히 난을 수습한 고려는 수도 이전이라는 특단의 조처를 내린다.

▲ 강화군 강화읍 고려궁지. 조선 시대 외규장각 구실을 하면서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했다. ⓒ 윤종훈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교정별감 최우는 대몽골 장기 항쟁을 위해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한다.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기마민족 몽골의 약점을 이용한 전략이다. 강화도는 들이 넓어 고려 조정을 충분히 떠받칠 경제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270년 고려가 몽골에 완전히 항복한 뒤 개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38년간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다.

고려가 개성으로 환도하자 강화 고려궁궐 파괴한 몽골

오늘날 경복궁이나 덕수궁을 생각하고 강화 고려궁지를 찾으면 실망하기에 십상이다. 변변한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성으로 돌아갈 당시 몽골은 고려가 다시는 강화도로 천도해 저항하지 못하도록 강화도 궁궐을 철저히 파괴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려 수도는 조선 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인정받아 왕이 머무는 행궁으로 위용을 되찾는다. 1635년 12월 기마민족인 만주족이 침략했을 때 조선왕실이 강화도 피난 결정을 내린 것도 그런 배경이다.

선발대인 소현세자와 왕비 일행만 먼저 강화도 피난에 성공하고 인조는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만주족 청나라는 몽골과 달랐다. 배를 마련해 1636년 1월 강화도를 함락한다.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과 왕실 가족이 포로로 잡힌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 갈등을 단번에 접고 다음 날 남한산성에서 내려온다. 1월 엄동설한에 눈길을 헤치고 한강 지류인 탄천 나루터 삼전도(잠실 석촌호수 근처)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 꿇고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린다.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찧는 만주족 전통 예법이다.

병자호란 때 만주족이 다시 강화 파괴

청나라는 몽골처럼 강화도를 다시 한번 불태웠다. 외세에 수없이 할퀸 민족사 수난의 현장이 강화다. 조선이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속국의 예를 바치고 안정을 되찾으며 강화는 부활한다. 고려궁지에는 강화유수가 거주하며 행정을 펴는 동헌이 복원됐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도 들어왔다. 조선왕실의 주요 문서들도 이곳에 보관했다. 그러나, 되살아난 강화에 수난이 이어진다. 이제 기마민족을 넘어, 일본과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이 강화도를 통해 한국을 노린다.

▲ 고려궁지 안에 있는 조선 중기 건축물 강화유수부 이방청. ⓒ 윤종훈

1866년 병인양요, 프랑스 침략으로 점령된 강화

강화읍은 바다 건너 손에 잡힐 듯 김포시와 마주 본다. 서울서 강화읍으로 가자면 김포를 거쳐 대개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거대한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사적 139호 문수산성이다. 수도 한양 입구를 지키던 문수산성은 문수골과 산성포, 두 계곡을 감싸 안으며 강화 앞바다에 이른다. 숙종 20년에 처음 쌓은 이 산성은 성벽 길이가 2,400m다. 사각형 돌로 단단하게 쌓은 성벽 위에는 병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낮은 담장인 성가퀴를 2,173곳에 둘러놓았다. 바다에서 침략해 올라오는 외적을 막기 위한 산성이기 때문이다. 성문은 3곳인데 공해루 성문이 갑곶진과 마주 본다. 강화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던 관문이었다.

▲ 김포시 월곳면 포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문수산성.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없어지고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 윤종훈

문수산성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1866년 1월 대원군은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에 들어간다. 8천여 신자와 9명의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다. 산으로 도망가 굶어 죽은 어린이와 아녀자를 포함하면 희생자는 더욱 늘어난다. 이때 세 프랑스 신부가 간신히 탈출해 중국 천진에 머물던 프랑스 인도차이나 함대 로즈 제독을 찾아간다. 격분한 프랑스는 보복을 청나라에 통보했고, 로즈 제독은 10월 7척 함대에 600여 병력을 태워 강화도와 문수산성을 점령한다. 강화가 3번째로 외세 손아귀에 들어간 거다. 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군은 한 달 만인 11월 수많은 왕실 문서와 책, 은괴 수천 냥을 약탈하고 외규장각 등 강화의 관아를 불사른 뒤 중국으로 돌아간다.

199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프랑스에 병인양요 당시 약탈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촉구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보아 1993년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1822년: 순조 22년) 1권이 먼저 돌아왔다. 이어,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중 양국 정상 합의로 외규장각 의궤를 영구임대 형식으로 되돌려 받았다.

1871년 신미양요, 4번째 외세 미국의 강화도 침략

강화도 북단에 강화대교가 있다면 남단에 새로 만든 다리는 초지대교다. 뭍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사적 225호 초지진이 나온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조선군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신미양요 때 강화도가 4번째로 외세에 짓밟힌 사연은 이렇다. 병인양요 직전이던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정박한 뒤 통상을 요구한다. 평양관민의 공격으로 배는 전소되고, 선원 24명 전원이 죽는다. 미국은 진상조사를 한 뒤 강경책을 편다. 일본 나카사키에 머물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5척의 군함에 1,230명의 병력을 태우고 강화도로 온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병력보다 2배나 많다.

▲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초지진. 해상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에 구축한 요새다. ⓒ 윤종훈

소규모 탐색전 끝에 6월 10일 육상 전투대원 644명이 초지진을 점령한다. 이어진 광성진 전투 등에서 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개항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오늘날 초지진에는 전쟁을 치른 쓰라린 과거와 달리 두 그루 커다란 소나무가 한가롭게 탐방객을 맞는다. 1656년(효종 7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 때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해 심은 나무다. 열강의 침입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선조들의 기상을 간직한 채 400년 넘게 의연히 강화를 지키는 소나무가 매국하는 무리보다 미더워 보인다.

1876년 일본 운양호 강화 침략으로 일본에 강제 개항

무대를 강화읍 내성 서문 근처 연무당(鍊武堂)터로 옮겨보자. 군사 훈련장소인 연무당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신미양요 때 미국이 성과 없이 물러난 4년 뒤 1875년 9월 이번에는 일본이 강화 앞바다에 나타난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군함 시위에 놀라 개항한 일본은 20여 년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한 뒤,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수법으로 군함 운양호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거다.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도 주민을 학살하는 등 만행이 이어지자 버티던 조선은 이듬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일본에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이다. 악랄한 일제 침략과 식민통치의 서막이었다. 그 조약 체결 현장이 연무당이다. 건물은 사라진 채 표석만 놓여 역사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 강화읍 연무당터. ⓒ 윤종훈
▲ 1876년 연무당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 회담장 모습. ⓒ 윤종훈

한민족 평화번영의 미래를 이해하는 열쇠, 강화 수난사

한민족 개국 시조 단군의 얼이 담긴 참성단 유적 너머로 천년 가까이 지속한 외세의 침탈 현장인 강화도. 연무당에서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고 식민지로 전락해갔던 조선의 뼈아픈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프랑스, 미국,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이 서로 다투며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고 이권을 챙기던 19세기 구한말과 오늘 한반도 상황을 견줘보자. 민족의 화해와 평화정착, 공동번영이라는 기치 아래 남북이 한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지만, 주변 강대국들은 각자 제 잇속에 따라 간섭을 일삼고 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패권에 종속돼 국방 현안이나 민족 공동체 건설마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패권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미국의 단호한 조처에 역시 강대 강으로 맞서는 중국의 세계전략 역시 우리민족 현실에 우호적이지 않다. 과거 군국주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채 ‘전쟁국가’로 거듭나려는 일본의 우경화는 제2의 운양호 우려를 낳는다.

외세에 할퀸 강화의 아픔을 딛고 미래를 개척해야 할 우리에게 강화의 역사유산들은 무얼 말하려는 걸까?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미래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했는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치고 수강생은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취재와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인데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월요일 오후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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