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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 한석봉이 패가망신한 이유

기사승인 2018.09.22  22: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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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제시어] ‘갈등’

[우수작] 

김계범 (숭실대 국어국문학):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박환의 (고려대 경영학): 사과했다고 실패한 건 아니다

양수호 (경상대 사회학): 여전히 외로운 광화문의 섬 하나

천재상 (가톨릭대 사회학): ‘난민 님비’ 사회

최준석 (가천대 언론영상광고학): 상극 아니면 상생의 버팀목

17기 대학언론인 캠프가 끝나고 두 달이나 지나 수상작을 발표하게 돼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캠프 직후 첨삭을 해 뒀지만 지난 학기 수업의 결과물과 시의성에 쫓기는 기사들을 내보내느라 발표가 늦었습니다.

   
▲ 17기 대학언론인 캠프 참가자들이 강연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13개 강좌에 참여하고 귀가한 뒤 온라인으로 글쓰기 과제를 제출해 첨삭을 받았다. ⓒ 윤종훈

수상자는 주소를 내 메일(hibongsoo@hotmail.com)로 알려주면 약속대로 인터넷서점에서 내 책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를 구입해 부치겠습니다. 수상작은 <단비뉴스>에 첨삭본과 함께 실을 예정이고 수상하지 못한 글은 첨삭본을 필자에게 바로 보내겠습니다. 각 응모작의 평가는 첨삭된 내용으로 대신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총평을 한 뒤 왜 글이 잘 안 써지는지 근본원인을 짚어보려 합니다.


글의 향기는 교양에서 나온다

우수작으로 뽑힌 글 중에는 제시어 ‘갈등’을 문제해결의 출발점으로 보는 등 갈등의 긍정적 의미를 부각한 것이 몇 편 있었다. 러스토우(D. A. Rustow)가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다. 사람의 인지구조는 갈등이 상존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무조건 빨리 갈등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이슈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도 갈등을 억압하거나 미봉해놓고 갈등이 해결됐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진화와 발전의 필수요건

정치뿐 아니라 생명체나 조직 내부 또는 사회 전반에 갈등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면 생명체가 진화하거나 조직 또는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 늦은 유학 시절 런던대학에 다니면서도 케임브리지에 6년간 살면서 누렸던 가장 큰 이점은 시민을 위한 ‘공개강좌’(Public Lecture)를 듣는 거였다. 특히 다윈 칼리지 연강(Lecture Series)은 학문 분야가 다른 세계적 석학들을 초청하는데, 2005년에는 ‘갈등’(Conflict)이 공통 주제였다. ‘게놈의 갈등’(Genomic Conflict) 같은 강연은 아예 듣지도 않았지만, ‘원숭이와 인간은 왜 (동족을) 죽이는가’(Why Apes and Humans Kill)와 유명한 BBC 기자인 케이트 애디(Kate Adie)의 ‘갈등 보도하기‘(Reporting Conflict) 등은 녹음까지 하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의 대학들이 공개강좌 같은 공적 서비스를 늘리게 된 배경에는 갈등의 역사가 있다. 귀족·성직자 학교로 출발한 초기 대학들은 배타적이어서 지역사회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에서는 ‘가운 대 타운’(Gown vs Town)의 갈등이 살인사건으로 번질 만큼 심해지자 유화책으로 대학 시설을 개방하고 시민 공개강좌를 열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한국의 젊은 석학들을 초청해 ‘인문교양특강’과 ‘사회교양특강’ 같은 무료 공개강좌를 국내 최초로 서울에 이어 제천에서 여는 이유도 대학의 공적 서비스를 염두에 둔 것이다.

칼럼은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충족해야

이번 응모작뿐 아니라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써내는 글 중에도 칼럼을 읽는 목적인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충족하지 못하는 글이 많다. 향기가 없는 조화(造花)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애써 칼럼을 읽어도 뭔가 보상받았다는 느낌이나 감흥이 없다. 일반 기사를 통해 이미 알려진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글이 많은데 나는 그 폐단의 근원을 한국의 글쓰기 교육에서 찾는다.

중고등학교와 논술학원은 물론 대학의 언론고시반에서도 신문 사설을 베껴 쓰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가 많은데, 이는 청소년의 창의성을 옥죄는 형틀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신문 사설은 창의성 없는 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들이 절대다수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길게 인용한 뒤 ‘그러면 안 된다’고 일갈하는 식으로 결론을 낸다. 신문사 논설진에도 잘 쓰는 ‘글쟁이’는 많지 않다. 논설위원은 글 쓰는 실력이 있건 없건 편집국 간부를 역임한 자를 예우하는 자리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나마 기명 칼럼은 신경을 쓰지만 사설은 숙제하듯 고민 없이 쓰는 이가 많다.

교양과 분리된 기능 교육의 비극

글이 안 써지는 근본원인은 교양(敎養)과 분리된 글쓰기 교육에 있다고 본다. 독일에서 논의된 교양(Bildung)의 개념은 ‘만들다’ ‘형성하다’를 뜻하는 독일어 ‘bilden’에서 왔다. 이는 정신적으로 미숙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성숙하는 과정이다. 학문을 통한 교양의 형성은 훔볼트에 의해 베를린대학의 건학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루카치(Lukács)는 기존 교양 개념이 개인의 사회화와 순응에 치우쳤다며 사회와 심각하게 갈등하고 그 대립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양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슬러 올라가서 옥스브리지 중심의 영국 대학이 신사 양성을 위한 교양 공동체로 발전해왔다면 미국 대학은 기능 교육에 힘써왔다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로스쿨, 비즈니스스쿨, 저널리즘스쿨의 3대 스쿨을 발전시킨 나라도 미국이다.

기능에 치우친 미국 교육의 문제는 교양을 소홀히 해 비판적 지성이 양성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을 국가 표준으로 삼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서 최상위 학생을 휩쓸어가는 법과대학, 특히 서울법대 출신이 대거 독재와 국정농단의 1급참모가 되고, 사법농단의 주역이 된 것은 고시과목만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법조인 양성 제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유수 대학 경영학과 출신이 재벌 편법경영의 하수인이 되고, 명문 대학 언론학과 출신이 공영방송 등 한국언론을 망친 주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한국의 저널리즘 교육은 기능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110여개 언론 관련 학과가 있지만, 기자나 PD 출신 교수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1~2년 현업에서 일하다가 유학을 갔다 온 이가 대부분이다. 2008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설립 당시 벤치마킹한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은 교수진 83명 거의 전부가 베테랑 언론인 출신이었다.

볼테르가 걱정한 언론인의 역사 무관심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미국식 직업학교이면서도 교육 역량의 절반 이상을 교양 교육에 투입하는 한국형 저널리즘스쿨이다. 실무교육과 함께 인문사회 교양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거야말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은 물론이고 언론윤리를 고양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입사하는 데는 물론이고 대기자나 대PD로 크는 데도 유리할 수밖에 없다.

교양 쌓기를 소홀히 하면서 언론인이 되려는 것은 성공하기도 힘들지만 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개원 10년째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지금까지 193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범언론계로 배출했고 각종 언론상을 휩쓸고 있지만, 조마조마하게 느끼는 게 있다. 아직은 없지만 혹시 '기레기'나 '피레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간혹 교양이 부족해 보이는데 언론사에 합격한 학생이 있기 때문이다.

‘문사철’의 하나인 역사에 관한 교양은 언론인에게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을 심어줄 뿐 아니라 기사나 칼럼의 전달력을 높이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역사가뿐 아니라 언론인도 인간들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강의’는 원래 ‘책을 함께 읽고 교양을 쌓아주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강의한다’는 말은 ‘독해한다’(lesen)는 말이고, 영국에서 교수는 대부분 ‘책 읽어주는 사람’(Lecturer, Reader)으로 불린다.

교양이 부족해서 패가망신한 예는 너무나 많지만 한석봉의 몰락은 그릇된 교육의 결과를 잘 보여준다. 사실 석봉 한호는 글씨만 잘 썼지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인성도 바닥이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선조가 글씨 잘 쓰는 것을 어여삐 여겨 한석봉을 가평군수로 임명했지만 그는 ‘군정(郡政)농단’을 일삼다가 탄핵당한다. 선조는 할 수 없이 그를 통천현감으로 좌천시키는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해져 결국 파직당하고 1년 만에 죽는다.

나는 한석봉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그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교과서에도 소개된 모자간의 일화는 교양을 소홀히 여기고 기능 교육에 ‘올인’하는 우리 교육의 허약한 뿌리를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물로 바위 위에 글씨 연습을 할 정도로 글씨 쓰기에는 조예가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같은 연습만 반복하라고 강요한다. 그때 만약 어머니가 “이젠 책도 좀 읽거라”고 당부했더라면 서예가의 명성뿐 아니라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나 역사를 바로 기록한 사관의 이름으로도 남지 않았을까? (이봉수 교수)


편집 : 이창우 기자

이봉수 hibongs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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