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구별짓기’

▲ 조현아 PD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의 바탕이 되는 사회적 문화적 자산에는 '자격증'이 포함된다. 자격증은 졸업증과 학위증 등 제도적으로 공인된 증서다. 부르디외는 체화한 교양이나 고가 예술품 취향뿐 아니라 '자격증' 역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누는 하나의 분류체계가 된다고 했다. 학벌과 각종 시험 등의 자격증 체계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정치, 사회, 문화적 위계를 발견한다. 이것은 계급서열로 이어진다. 즉 '계급'이 교육을 통해 생산되고 물려진다는 것이다. 영화 속 여자는, 이대를 나오지 않은 여자들보다 서열 우위를 느끼며 그 대사를 말했을 것이다.

교육은 아주 오랫동안 신분 상승의 수단이었다, 과거 사농공상 신분질서 시절에서부터 현대 사회의 '고시'에 이르기까지. 자격증으로 표현되는 유형의 교육을 받고 정형화한 틀의 '시험'을 통과하면 능력을 인정받고 성공 계층에 진입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수많은 이들이 가난을 뚫고 시험을 통해 탄탄대로를 걸어갔고 ‘개천 용’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교육학자 이경숙은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는 시험의 선언은 개방과 평등을 상징했으며, 실력으로만 사람을 측정한다는 것이 '공정성'이라는 긍정적 명분을 갖게 했다고 말한다. 공정한 시험이 교육을 '공평한' 계급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줬다는 얘기다.

하지만 교육을 진짜 공평한 계급 투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이나 순환 가능성이 희박해진 지 꽤 오래다. 교육은 더 이상 계층간 사다리 구실을 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구 소득 수준과 자녀의 성적 순위는 거의 일치한다. 한국개발연구원에 따르면 부모 월소득이 100만원 많으면 자녀 수능 영어 점수 백분위가 2.9단계 올라갔다. 언어는 2.2단계, 수학은 1.9단계 높아졌다. 서울대 입학생 가운데 강남 3구 출신, 고위 관료와 고소득층 자녀 비율이 높다는 뉴스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부르디외의 말처럼 교육이 계급적 차이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분명히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 교육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사다리가 되었다. ⓒ pixabay

교육이 그 자체로 서열과 구별짓기를 내면화하는 장이 된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오로지 입시를 향한 교육 시스템에는 무한경쟁구도, 승자독식체제가 자리한다. 2등은 1등 뒤의 빛 바랜 숫자일 뿐이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학생을 향한 교사와 학교의 관심은 성적순에 비례한다. 책 <학교라는 괴물>은 이를 '승자에게 추가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패자의 몫을 삭감하여 승자에게 얹어주는 식의 경쟁'이라고 표현했다. 공부 잘하는 소수의 이들에게만 1:1 멘토링, 특별반 편성, 별도의 자율학습 전용실 등의 혜택을 준다. 학생은 점수로 줄 세워지며,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 과정에서 편법과 요행도 용인된다.

구별짓기로 대변되는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차별과 배제는 당연한 것이다. 최근 한 대학 게시판에 '학벌주의가 더 심해졌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자신은 철저한 노력으로 이 정도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정도 노력을 하지 않은 이들과 차등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는 무한경쟁논리를 체화한 젊은 세대들이 자신보다 낮은 '하류인간'을 구분지으며, '차별과 배제'를 옹호한다고 얘기했다. 임금격차에 찬성하고, 학벌 블라인드 폐지와 비정규직-정규직 구분 철폐에 반대한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과 시간제 교사의 정규직 전환을 제일 크게 반대한 것도 다름 아닌 젊은 층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바로 그들 또래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어느 사회학자는 말했다. "병든 사회는 병든 개인을 낳는다"고. 병듦의 원인은 개인이 아닌 사회 경제적 차별을 각자의 책임으로 전가하게 만드는 경쟁주의, 잘못된 노동시장 구조와 정책, 뒤틀린 교육시스템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사회적 구별짓기를 대물림하고 구별짓기의 논리를 공고화,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프다. 이런 모습의 계급투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은 개인은, 아마 평생 차별을 내재화하며 자신과 자신보다 낮은 타인을 구별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핀란드 교육은 '학교에서 협동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책임지는 미래의 사회는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언제쯤 구별짓기가 희미해지는, 지속가능한 교육과 사회를 만나게 될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안형기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