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솔티 홉 수확축제

“이 동네에서 애기 웃음소리 들어본 지가 30년만입니다. 솔티홉수확축제 덕분에 농촌에 젊은이들도 다시 오고. 오랜만에 마을의 경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솔티마을 윤재환(67) 반장은 행사가 시작되자 마을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까무잡잡하고 주름진 얼굴에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 지난 1일 제천시 봉양읍 솔티마을에서 ‘솔티 홉 수확 축제’가 열렸다. 올해로 3회를 맞는 이 행사는 수제맥주 양조장인 뱅크크릭 브루잉(홍성태 대표)과 솔티맥주를 유통하고 홉 농사를 담당하는 농업회사법인 ‘맥주 만드는 농부’(장동희 대표)가 함께 주최했다. 행사장에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에서 온 양조 전문가와 맥주 마니아에서부터 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 온 지역주민, 예비 귀농·귀촌인을 포함해 150여 명이 참석했다. 축제는 홉 따기, 수확한 홉으로 리스 만들기, 양조장 투어 등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했다.

▲ 강한 햇볕을 피해 천막 아래에서 홉을 따는 참가자들. ⓒ 김미나
▲ 제천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세하의 집’에서 생활지도원과 10명의 이용자들이 축제에 참가해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김미나

고추농사만 짓던 솔티마을, 홉 농사로 전환

‘소나무 언덕’ 또는 ‘소나무 고개’란 뜻을 가진 솔티마을은 공기 좋고 물 맑기로 소문난 제천에서도 아름다운 환경을 자랑한다. 뱅크크릭 브루잉 홍성태(52) 대표는 2015년 맥주 양조와 홉 농사의 최적지로 이 마을을 선택했다. 맥주 맛은 그 지역의 물과 기후환경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제천은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풍부해 홉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 윤재환 반장은 “젊은이들 덕에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 됐다”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돕고 싶다”고 말했다. ⓒ 김미나

“여기는 원래 30~40년 동안 고추 농사만 짓던 곳이에요. 근데 고추는 농사짓기가 너무 힘들어요. 마을 사람들 평균 나이가 70인데, 쪼그려 앉아서 10시간 동안 농사일을 하는 게 쉽지 않죠. 어느 날 홍 대표가 찾아와 홉 농사를 짓자고 했어요. 수확한 홉으로 맥주를 만드니 유통 걱정도 없고, 나이든 농사꾼이 짓기도 편했죠.”

양조장 오른편으로 계곡이 흐르고. 뒤로는 소나무가 울창한 산자락이 펼쳐진다. 윤 반장은 “본래 양조장 위치는 논자리였다”고 3년 전 일을 회상했다. 그날 이후 고추농사를 짓던 농민 중 일부가 홍 대표의 제의를 수락해 작목을 전환했다. 홉은 다년생 식물이라 한번 심으면 30년까지 농사지을 수 있고, 심은 해에 바로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높이 올라가는 넝쿨 식물이라 힘들게 앉아서 일할 필요도 없다. 현재 솔티마을에서 다섯 가구가 7천 평 규모의 홉 농사를 짓고 있다. 올해는 옆 동네에 3만 평을 임대해 재배 면적을 넓혔다.

“홉 따고, 홉 넝쿨로 리스 만들어요”

양조장에서 마을 입구로 향하는 길을 따라 50미터쯤 내려가자 만난 홉 밭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늘을 향해 길게 늘어선 홉 넝쿨이 바람을 타고 넘실대고 있었다. 홉 밭의 양옆으로 나무로 된 기둥이 줄을 맞춰 하나씩 세워져 있고, 땅에서부터 홉 넝쿨이 유인 줄을 따라 성인키보다 높게 자라고 있다. 참가자들은 한 사람씩 넝쿨 앞에 서서 홉을 따기 시작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장대로 5~6미터 넝쿨이 달린 줄을 끊어서 수확했다.

▲ 축제 참가자들이 수확한 홉 넝쿨을 든 채 웃고 있다. ⓒ 김미나
▲ 홉을 따고 있는 축제 참가자 장수희씨. ⓒ 김미나

“저는 몇 년 전, 제천영화음악제에 왔다가 솔티맥주를 알게 됐어요. 맥주 원료를 수입해서 사용하는 곳은 많지만 솔티맥주처럼 원료를 직접 농사짓는 곳은 잘 없잖아요. 맛도 좋고. 그때부터 솔티맥주를 응원하게 됐어요.”

서울에서 친구 셋과 같이 왔다고 말한 장수희(36·서울)씨는 “평소 맥주를 즐겨 마시지만 홉이 넝쿨 식물이라는 것을 몰랐다”며 “생홉에서 과일 향기가 난다”고 체험 소감을 말했다. 그는 “작년에 오고 싶었지만 때를 놓쳐 이번에 큰맘 먹고 왔다”고 덧붙였다.

▲ 한슬기씨가 자신이 수확한 홉을 내보이며 자랑했다. ⓒ 김미나

한국가양주연구소(소장 류인수) 졸업생들과 버스를 대절해서 단체로 왔다는 한슬기(28·서울)씨는 일회용 봉지에 수확한 홉을 가득 담았다. 그는 “홉 따는 것이 처음”이라며 “직접 체험해보니 홉 줄기가 생각보다 거칠고 끈적였다”고 말했다.

▲ 오른쪽 최경원(35·청주)씨는 왼쪽 분홍색 면티를 입고 있는 남편과 같이 축제를 찾았다. 그는 홉 리스를 만들 목적으로, 남편은 좋아하는 맥주를 실컷 마실 작정으로 기차 타고 왔다고 했다. ⓒ 김미나
▲ 박주녀씨가 수확한 넝쿨로 장민준 군이 리스를 만들고 있다. ⓒ 김미나

“우연히 지역뉴스 보고 아이랑 같이 왔는데 너무 좋네요. 오늘 토요일이라 아이가 어린이집을 안 가거든요. 저는 맥주 마시고, 아이는 자연에서 뛰어놀고. 옆에 있는 아이도 엄마랑 같이 와서 함께 놀고 있어요.”

제천에서 온 박주녀(44·제천)씨는 아들 장민준(4) 군의 손을 잡고 축제를 찾았다. 그는 “평소 맥주를 좋아하지만 육아를 하며 마실 시간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축제 동안은 솔티 트리펠과 솔티8 맥주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그는 4잔째 마시는 중이라고 했다.

“망고·포도·아로마 등 홉 품종에 따라 맥주 향 달라져”

▲ 홍 대표가 홉의 특징과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 김미나

“1960년대 홉 농사를 강원도에서만 한 이유는 태풍이 오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지나는 자리는 홉을 키우기 힘들어요. 홉은 꽃이라 태풍이 불면 안 열리기도 하고요. 그 부분을 제외하면 한국은 홉 농사를 짓는 데 큰 문제가 없어요. 최근 경기도, 경남, 전북에서도 홉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국내에서 196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홉이 재배된 적이 있지만 1990년대 값싼 외국산 홉 수입이 본격화하자 1년 만에 홉 농가는 거의 전멸했다. 현재 국내 맥주회사는 원료 전량을 수입한다. 최근 수제맥주 열풍과 함께 홉 농사의 복원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유럽 양조장 대부분이 홉 농장을 보유하고 있는 것에 견주면 한국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홍 대표는 “한국 맥주의 맛은 너무 단순하다”고 비판했다. 한국 맥주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다양한 맛으로 구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홉은 품종에 따라 시트러스(감귤류), 아로마, 망고 등 다양한 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홉은 맥주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재료인데도 국내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13가지 품종을 시험 재배한다. 이 중에서 할라터우(Hallertau), 테트낭어(Tettnanger), 너겟(Nugget), 퍼글(Fuggle) 4개 품종을 주력 작목으로 두고 있다. 제천 지역의 기후 조건에 맞아 수확량이 많은 것은 너겟과 퍼글이다. 홍 대표는 “잘 되는 품종의 홉을 찾고, 연구하는 것은 농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 ‘맥주 만드는 농부’ 장동희 대표는 홉에 루풀린(lupulin)이라는 향기와 쓴 맛이 있어 유럽 사람들은 홉을 꿀에 재워 꿀 차로 먹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김미나

올해는 폭염과 가뭄으로 농촌지역 피해가 컸다. 솔티마을의 홉 농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푸르러야 할 홉이 과일의 일소피해처럼 전체적으로 잎이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다.

맥주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낮추고

▲ 양조장을 둘러보는 참가자들에게 홍 대표는 맥주 만드는 과정은 식혜를 만드는 방법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 김미나

“벨기에 맥주는 발효와 숙성 방법이 일반 맥주와 달라요. 벨기에 맥주는 대부분 두 번 발효시킨 이양주입니다. 발효 횟수가 많아질수록 알코올 도수가 올라가고 맛은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무엇보다 풍미가 좋죠. 많은 단계의 발효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보통 6~7주 정도 긴 시간이 걸립니다.”

참가자들은 홍 대표의 설명을 들으며 양조장을 견학했다. 뱅크크릭 브루잉은 벨기에 전통 양조방식을 따르는 곳이다. 일반 맥주보다 제조 시간이 몇 배나 걸리지만 맥주의 향과 맛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홉의 양을 아끼지 않고 맥주에 넣는다. 보통 1000L 맥주에 홉을 5kg 사용하지만 솔티맥주는 20kg을 사용한다. 양조장이 홉 농장을 갖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 홍 대표는 “주세법에 홉을 건조시켜 사용하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 생홉을 넣었을 때 맛이 더 좋다”며 주세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미국 양조장에서는 생홉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 김미나

“원래 우리 조상들은 술을 복잡하게 만들어 먹었어요. 사람들은 맥주를 만들 때 완전히 독일식처럼 보리와 홉, 효모, 물만 넣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제가 벨기에 갔더니 ‘왜 그것만 넣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식초도 넣을 수 있고, 감태도 넣을 수 있고, 다른 것도 넣을 수 있다는 거죠. 맥주에 쌀을 넣어 발효와 숙성을 거친 뒤 서로 섞기도 하면서 맛을 내면 얼마나 좋아요? 쌀 소비도 촉진되고.”

‘어떻게 하면 더 싸고 맛있는 맥주를 만들 수 있을까?’ 홍 대표는 끊임없이 연구하며, 수제 맥주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그는 “맥주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뿐 아니라 가격을 떨어뜨려 다양한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올해 목표라고 밝혔다.

“팔(八)도에 고하노라”

▲ 솔티8 상호 밑에는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쓰여 있다. ⓒ 김미나

“요즘 강서맥주, 달서맥주, 전라맥주 등 지역 이름을 딴 맥주 브랜드가 많아요. 저도 제천맥주라고 이름을 붙일까 고민했지만 남들처럼 하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이 마을 지명인 솔티를 따서 맥주 이름을 지었고, 제천을 대표하는 맥주를 따로 하나 만들었어요. 제천은 의병이 가장 유명하잖아요.”

의병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제천에서 매년 10월 초, 제천의병제가 열린다. 구한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지역이기 때문이다. 홍 대표는 제천 의병장인 ‘의암 류인석’ 장군을 기리고자 솔티8를 만들었다. 솔티8은 의병 봉기를 위한 격문의 첫 문장인 ‘팔(八)도에 고하노라’에서 착안해 지은 이름이다.

“알콜 도수도 8에 맞추고, 쓴맛도 최대한 강하게 했죠. 일본에 결국 나라를 넘겨줬잖아요?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을 쓴맛으로 표현한 거죠. 그러나 너무 쓰면 마실 수 없기 때문에 홉의 쌉싸름한 맛과 아로마 향이 가장 많이 나는 맥주라고 보면 됩니다. 쓴맛을 느끼며 언젠가는 조국을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맥주에 표현했죠.”

▲ 행사장에서는 솔티8 맥주를 자유롭게 맛볼 수 있다. ⓒ 김미나
▲ 축제 참가자들이 솔티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기고 있다. ⓒ 김미나

편집 : 윤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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