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스타’

▲ 반수현 PD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설렌다는 건 생각해보면 기묘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 누군가의 팬으로 산다면 익숙한 감정이기도 하다. 두 눈으로 스타를 직접 보지 않고도 충분히 ‘팬질(팬 활동)’을 할 수 있다.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는 스타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보다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스크린은 텔레비전과 PC를 거쳐 모바일로 발전해나갔다. 팬질의 역사는 곧 미디어 발달의 역사다.

내가 가수 이센스를 좋아한 궤적도 그와 일치한다. 2009년 그가 데뷔했을 때 텔레비전으로는 음악방송 ‘엠 카운트다운’을, PC웹으로는 ‘보이는 라디오’를 챙겨봤다. 모바일이 보편화한 이후에는 유튜브 앱으로 영상을 찾아보고 음원사이트에서 스트리밍을 했다. 이후 팬질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처음으로 콘서트에 갔다. CD 같은 라이브를 들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잘 안 보일 줄도 알고 있었다. 그냥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여태 좋아해온 스타가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를.

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직접 보고 감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관’(직접 관람)에 대한 욕망은 팬이 스크린 너머 연예인에게 실제로 가 닿기 위한 마음이다. 김연아 경기도 중계방송으로 보면 더 잘 볼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트리플 토룹 점프를 하는 걸 직접 보고 싶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막장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원리와 같다. 안 봐도 뻔하다. 결국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것이고 악질 시어머니는 아들이 데려온 애인에게 흰 봉투를 내밀면서 파혼을 권유할 것이다. 그런데도 시청률이 나온다. “어디서 눈을 그렇게 동그랗게 뜨고 노려봐?” 그럴 때의 야멸찬 표정을 두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그 신경질적인 말을 두 귀로 직접 듣고 싶기 때문이다. 직관의 매력은 역시, ‘내가 봤다’는 그 자체다.

팬들이 ‘직관’에 열광하는 이유는 스타의 모사품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단 하나 진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상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가 무한으로 복제되는 현실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듯이 시뮬라시옹이다. 실체를 모방하는 복제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령 어떤 연예인이 죽음으로 떠날지언정 팬들은 언제나 스크린으로 그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팬이 본 연예인은 애초부터 그의 복제물이었다. 그는 팬들 곁을 떠났으면서도 떠나지 않았다. 냉정히 말하자면 팬이 마주한 현실은 그의 죽음 이전과 이후가 다를 게 없다.

▲ 보드리야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무한으로 복제되는 현상을 시뮬라시옹이라 불렀다. ⓒ 픽사베이

이런 현상은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더욱 심화했다. 활자보다 스크린이 이전보다 연예인을 생명력 있게 묘사했고 더 매력 있게 만들었다. 한 뼘 스크린인 스마트폰이 함께하게 된 이후 더 그렇게 됐다. 미디어가 생활밀착형 아이템이 되면서 그만큼 스타는 팬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스마트폰을 열어볼 때마다 바탕화면에서 나를 향해 눈웃음치는 스타를 보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스타가 출연한 프로그램의 클립영상을 찾아본다. 영상물은 캡처와 같은 손쉬운 방식으로 복제된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해낸다. 미디어 발달로 이제 시뮬라시옹은 내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스타의 복제물이 내 삶 도처에 널려있다.

진짜 스타보다 더 진짜 같은 복제물이 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세상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그런 존재를 진실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팬들 사이에서 ‘직캠’(직접 캠코더로 찍은 영상)만큼 꾸준히 소비되는 콘텐츠는 없다. ‘직캠’에는 현장성이 담겨 있다. 스타와 팬이 같은 시공간에 머물렀다는 증거다. ‘직캠’은 ‘직관’을 하지 못하는 팬들의 대리만족 수단이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복제물이 포화 상태에 접어든 지금, 팬들은 시뮬라시옹에 염증을 느낀다. 실제로 접하고 실체를 확인한 사람만을 좋아할 수 있다는 인류의 오랜 경험에 따라, 인간과 인간이 접촉하는 방식은 다시 ‘면대면’(직접 관람)으로 회귀하는 중이다. 디지털 시대에 스타는 더 이상 스크린 속에서 침묵하는 존재가 아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연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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