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일’

   
▲ 조은비 기자

신도 쉬었다. 기독교 <구약성경> 첫머리에는 신이 6일 동안 하늘과 땅, 동물과 식물, 사람을 만들고 7일째 되는 날, 모든 일을 그치고 쉬었다고 돼있다. 전지전능한 신조차 격무 뒤에는 안식이 필요했나 보다. 태초의 인간에게 노동하지 않을 자유를 선물한 기독교의 신은 ‘노동의 고통’을 일찌감치 알았던 게 분명하다. 기독교의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우리와 달리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신이 지은 안전한 에덴동산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나는 작물들로 풍족하게 먹고 마셨다. ‘창세기’는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해 ‘영원히 노동하는 형벌’을 받았다고 전한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땀 흘리는 수고를 통해서만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얻어 생존할 수 있게 됐다.

영원히 노동하는 형벌은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는 죽음에 맞섰다가 신의 징계를 받는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인데, 바위는 산꼭대기에 닿자마자 굴러 떨어진다. 그는 의미 없는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살아간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시포스를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부조리의 영웅으로 격상시켰다.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이후 현대적 의미의 노동자 계급이 유럽 전역에 퍼졌을 때다. 노동자들은 시시포스처럼 종착점 없이 매일 반복되는 노동에 시달렸고, 질 낮은 복지로 매일같이 죽어나갔다. 사실상 영웅이라기보다 희생자에 가까웠다.

▲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시포스를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부조리의 영웅으로 격상시켰다. ⓒ Pinterest

카뮈는 시시포스가 노동의 부질없음과 상황의 부조리함을 깨달을 때 그것을 기쁘게 수용할 정도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봤다. 인간은 카뮈의 발견처럼 ‘노동해야 하는 숙명’을 인식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안정적인 생존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만큼은 카뮈의 방식대로 삶을 수용하고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인정받는 노동’의 희소가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으며 그마저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지난해 4월, 경북이 고향이던 25살 청년은 서울에서 3년 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실패 후 어머니와 낙향하던 길에 목을 맸다. 같은 해 3년차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28살 청년은 예산 편성으로 격무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누군가는 형벌인 노동을 얻지 못해, 누군가는 얻었지만 감당하지 못해 아까운 생을 잃었다.

이 부조리는 죽음이라는 문턱에만 걸려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 청년들은 노동다운 노동을 얻기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다. 숱한 대졸 청년 실업자들이 노동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일을 한다. 가까스로 노동시장 진입에 성공한 청년들은 ‘워라밸’이 보장된 직장으로 이직을 준비한다. 이들이 열망하는 일자리가 영원히 꿈꿀 수 없는 이데아인 청년들도 있다. 재작년 갓 스물이 된 청년은 천 원짜리 컵라면 한 개도 뜯을 새 없이 출동해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혼자 고치다가 지하철 문틈에 끼어 죽었다. 제주에 살았던 19살 민호 군은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12시간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다 음료 적재기 벨트에 목이 끼어 숨졌다. 이들은 신보다 열심히 일하다가 신의 선물인 생명마저 잃었다.

▲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의 고통을 스스로 껴안아야만 노동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 웹툰 <미생>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의 고통을 스스로 껴안아야만 노동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대부분 젊은 구직자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노동의 숙명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다. 개인의 수용적 태도만으로는 이 부조리한 세계를 한 치도 변화시킬 수 없다. 세상을 향해 염세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소설가 카뮈는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그 세계에서 살아갈 개인이 실존 가능한 삶의 태도를 일러주었다. 그는 공고한 부조리의 세계에 균열을 냈지만 허물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함께 목소리를 내야만 바뀐다. 연대는 내가 딛고 있는 세계가 완전히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작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고하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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