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소확행’

▲ 박선영 기자

한량. 과거 일정한 직책 없이 놀고먹던 양반 계층을 부르던 말이다. 지금도 놀고 먹는 백수를 비아냥댈 때 ‘한량‘이라 부른다. 중고교 시절에는 비행 청소년을 ‘노는 애’라고 불렀다. 다른 학생들이 공부할 때 노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드러난다. 노는 것은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이런 시선은 더욱 확장돼 일한 뒤 노는 사람들도 일종의 자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시골 농민들이나 아주머니들이 일 년에 한두 번 버스를 대절해 춤을 추거나 관광지에서 음주가무를 하는 것조차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우리 사회는 ‘노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이런 불안감을 갖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껏 놀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들도 그러길 바라는 감정을 키웠을 뿐 아니라 노는 것을 말리려 들기까지 한다. “너 그렇게 놀다, 커서 뭐 될래.” 부모님께 자주 들은 말이다. 놀더라도 적당히 놀아야 하며, 노는 것 자체도 다음 일을 하기 위한 휴식으로 여기게 됐다.

한국인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달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할 때 ‘걷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인이 달려야 하는 이유는 있다. 내가 아니어도 나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많고, 좋은 일자리는 한정돼 있다. 그러니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 쉬지 않고 달려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한정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달릴 때, 쉬면 자신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보고 겁을 먹게 된다. 겁에 질린 나는 지쳤음에도 다시 뛰기 시작한다. 겁에 질려 달려나가는 사람을 본 사람들도 같이 뛰기 시작한다. 그렇게 불안감은 사회 전체에 전염된다. 그래서 시인 이상은 ‘오감도’에서 두려움에 빠진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라고 절규했는지도 모른다.

앞서 달리는 사람의 성공담 중에는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같이 달리다 넘어지는 사람을 봐도 내가 아님에 안도하며 계속 결승선을 향해 달려간다. 불안감이 퍼진 사회는 멈추는 방법을 몰랐다. 모두 결승선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마침내 쉴 수 있다고 믿었다.

▲ 인생은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직선이 아닌, 예측 불가능한 곡선이다. ⓒ pixabay

결승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또 다른 결승선 뒤의 휴식을 약속하는 말뿐이었다. 이에 청년들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앞서간 사람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결승선이 과연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달리기를 하나둘 멈췄다. 그러자 참고 있던 숨이 돌아왔다.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아도 쉴 수 있다는 것을, 쉬어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년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도 가보고, 왼쪽으로도 가보고, 뒤를 돌아 걸었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소확행.’ 소소하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게 된 청년들의 유행어다. 지금 달리기를 멈추면 확실한 휴식이 찾아오고 숨을 쉴 수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하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휴식이다. 그들이 앞선 세대보다 약해서, 게을러서, 열정이 덜해서, 응석받이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일할 때 걷는 법을 배우는 첫 세대일 뿐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경민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