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삶에 지친 어느 날의 몽상

▲ 이연주 PD

“손님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곧 이륙하겠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활주로도 공항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활주로 저 멀리 물 머금은 희미한 불빛뿐이다. 불빛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내 인생 같다.

재작년, 5년 동안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다. 붙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실망감이 컸다. 처음으로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게 건방지지만, 시험도 잘 쳤고 면접에서 대답도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떨어졌다. 면접을 함께 본 사람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충격이 컸다. 도대체 왜 내가 아닌 그가 붙었을까? 직무에 관련된 용어조차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의구심이 들었다. 소문처럼 실력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채용 여부를 결정짓는 건 아닐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최근 뉴스에서 공공기관, 대기업, 은행 등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기관과 기업의 채용비리 사건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 비행기가 이륙할 때 보이는 자욱한 안개는 불투명한 내 인생의 항로를 말해주는 듯하다. ⓒ 이연주

앞으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정권이 교체되면서 음습했던 과거사가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누가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한때 떠들썩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일은 망각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일이 그동안 반복되지 않았던가? 좋든 나쁘든 현재 질서를 뜯어고치기 싫어하는 기득권층은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은 하지 않은 채.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내 말에 부모님은 한숨만 내쉬었다. 몇 주간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한숨 소리와 나 때문에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한국에 있기 싫었다. 이 나라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편의점 일뿐이라는 게 서글펐지만, 빨리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궂은일 잔일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 나는 이 나라를 벗어난다.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의 안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우리나라 기업의 외국 물류창고를 관리하는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본 게 아니라 알음알음으로 구한 자리다. 젊은이들이 지원하지도 않고 보수도 많지 않지만, 이곳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가 뜨더니 안개를 뚫고 상공으로 향한다. 뿌연 안개 속으로 세상이 보인다. 신기하다. 땅에선 높아 보였던 건물들도 하늘에선 다 고만고만해 보인다. 내 마음 속에 깃든 섭섭함과 원망, 억울함도 저렇게 작고 보잘것없으리라.

비행기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곳을 지나고 있다. 벨소리가 울린다. “손님,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로 전환해주십시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 줄 알았는데, 안 되었나 보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든다. 서울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다. 거절을 누른다. 문자가 온다. “◯◯기관입니다. 채용 절차 문제로 귀하의 채용이 재확정되었습니다. 회신 부탁 드립니다.”

◯◯기관은 내가 채용시험에서 탈락했던 곳이다. 최근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멍때리는’ 기분이 이런 걸까?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누른다.


편집: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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