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삶에 지친 어느 날의 몽상
“손님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곧 이륙하겠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활주로도 공항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활주로 저 멀리 물 머금은 희미한 불빛뿐이다. 불빛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내 인생 같다.
재작년, 5년 동안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다. 붙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실망감이 컸다. 처음으로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게 건방지지만, 시험도 잘 쳤고 면접에서 대답도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떨어졌다. 면접을 함께 본 사람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충격이 컸다. 도대체 왜 내가 아닌 그가 붙었을까? 직무에 관련된 용어조차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의구심이 들었다. 소문처럼 실력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채용 여부를 결정짓는 건 아닐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최근 뉴스에서 공공기관, 대기업, 은행 등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기관과 기업의 채용비리 사건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정권이 교체되면서 음습했던 과거사가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누가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한때 떠들썩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일은 망각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일이 그동안 반복되지 않았던가? 좋든 나쁘든 현재 질서를 뜯어고치기 싫어하는 기득권층은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은 하지 않은 채.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내 말에 부모님은 한숨만 내쉬었다. 몇 주간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한숨 소리와 나 때문에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한국에 있기 싫었다. 이 나라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편의점 일뿐이라는 게 서글펐지만, 빨리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궂은일 잔일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 나는 이 나라를 벗어난다.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의 안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우리나라 기업의 외국 물류창고를 관리하는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본 게 아니라 알음알음으로 구한 자리다. 젊은이들이 지원하지도 않고 보수도 많지 않지만, 이곳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가 뜨더니 안개를 뚫고 상공으로 향한다. 뿌연 안개 속으로 세상이 보인다. 신기하다. 땅에선 높아 보였던 건물들도 하늘에선 다 고만고만해 보인다. 내 마음 속에 깃든 섭섭함과 원망, 억울함도 저렇게 작고 보잘것없으리라.
비행기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곳을 지나고 있다. 벨소리가 울린다. “손님,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로 전환해주십시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 줄 알았는데, 안 되었나 보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든다. 서울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다. 거절을 누른다. 문자가 온다. “◯◯기관입니다. 채용 절차 문제로 귀하의 채용이 재확정되었습니다. 회신 부탁 드립니다.”
◯◯기관은 내가 채용시험에서 탈락했던 곳이다. 최근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멍때리는’ 기분이 이런 걸까? 비행기 모드 버튼을 누른다.
편집: 김태형 기자
단비뉴스 시사현안팀장, 전략기획팀, 미디어콘텐츠부 이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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