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⑳월드컵 이전에도 인류 묶어줬던 ‘공’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1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편을 보자. 김유신이 김춘추를 불러 자기 집 앞에서 공놀이를 하다 일부러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끈을 떨어트린다. 유신은 집으로 들어가 옷끈을 달자고 권한다. 춘추는 유신의 여동생 문희(文姬)와 눈이 맞는다. 문희는 아이를 갖고, 유신은 혼전 임신을 물어 여동생 문희를 태워 죽이려 든다. 피어오른 연기를 보고 이를 안 선덕여왕이 명해 춘추와 문희가 혼례를 올린다. 여기서 태어난 아들이 문무왕이라고 일연은 적는다. 신라 경주 김씨 왕실에 가야 출신 김해 김씨 김유신의 혈통이 섞인 거다. 김유신의 계략이었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유신의 정치적 의도보다 신라 시대 공놀이다. 그 공놀이가 축구였을까?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며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월드컵이 어제 한 달 여정을 끝냈다. 축구가 왜 이렇게 인류를 열광시킬까? 축구의 기원과 고대 풍속도를 들여다보면, 그 열광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허벅지로 축구공을 다루는 그리스 청년. 무덤에 넣은 묘지석의 일부다. 축구 장면을 담은 가장 오래된 유물로 유럽축구연맹이 주관하는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 트로피에 새겨졌다. BC 400년.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김문환

◇축구 천재 메시를 연상시키는 고대 그리스 청년의 공 다루기 조각

지난 6월 27일 새벽 3시 러시아의 문화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월드컵 조별리그 D조 예선 마지막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경기. 반드시 승리해야 16강에 오르는 절박한 상황의 아르헨티나는 시작부터 나이지리아를 몰아붙였다. 전반 13분 52초 경기장 중간 하프라인에서 아르헨티나 에베르 바네가 선수가 깊숙한 패스를 나이지리아 진영으로 찔러 줬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전력 질주하던 축구 천재 메시가 왼쪽 무릎 위 허벅지로 받아 발등으로 한 번 더 고른 뒤, 오른발로 차 넣었다. 하프라인에서 골문 통과까지 4초 만에 이뤄진 전광석화 같은 골. 메시의 환상적인 허벅지 볼 컨트롤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리스로 가보자.

7월의 아테네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이글거리는 태양, 불볕더위로 타오른다. 강렬한 햇빛을 피해 그리스 문명의 보고(寶庫), 오모니아 광장 근처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의 시원한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장엄한 이오니아식 기둥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리스 로마의 빼어난 조각들이 탐방객을 반긴다. 대형 동상들을 지나 장례 묘지석(stele)들을 모아 놓은 전시실에서 작은 소품 하나에 눈길을 빼앗긴다. 작은 대리석 조각에는 월드컵의 메시처럼 허벅지로 공을 다루는 청년의 모습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2400년의 시차를 없애며 고대 그리스와 현대 월드컵을 이어주는 조각에 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축구공 유물. 털을 뭉쳐 만들었다. 서한 시대 BC 206년∼AD 8년. 둔황 출토. 란저우 간쑤성 박물관. ⓒ 김문환

 ◇유러피언 컵(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에 새겨진 그리스 조각

설명문을 읽어보자. 아테네 남쪽 해안에 위치한 아테네의 관문 피레우스항에서 출토된 BC 400년경 조각이다. 아테네 북동쪽으로 마라톤 방향에 자리한 험준한 돌산 펜텔리쿠스의 대리석(pentellic marble)으로 만들었다. 연노란색을 띠는 펜텔리쿠스 대리석은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반짝여 고급 조각이나 건축 소재로 쓰인다. 현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신전을 복원하는 대리석으로도 이름 높다. 망자(亡者)를 기리는 묘지석의 일부인데, 그리스 도자기의 하나인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 형태다. 루트로포로스는 결혼식 첫날밤 목욕물을 담는 데 쓰이는 도자기다. 총각이 죽을 때 함께 묻어줬으니… 우리식으로 치면 결혼도 못 해보고 죽은 총각이 몽달귀신 되지 말라고 빌어주는 것과 같다.

망자로 추정되는 건장한 청년은 당시 그리스 풍속대로 옷을 벗고 운동 중이다. 그리스 남성들이 입던 긴 겉옷 히마티온(himation)이 뒤쪽 기둥에 얹혔다. 청년 앞은 키 작은 소년 시종으로 손에 기름도자기병 아리발로스(aryballos)와 때밀이 스트리질(strigil)을 들었다. 운동 뒤 목욕할 때 쓰는 물품이다. 청년의 포즈를 뜯어보자. 오른손을 몸 뒤로 돌려 왼쪽 손목을 잡고, 상체를 기울여 오른쪽 무릎으로 공을 다룬다. 축구선수들이 몸풀기 동작으로 연습하는 볼 컨트롤 장면과 판박이다. BC 5세기 발로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현대 축구와 다르지만 말이다. 이 장면은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유러피언 컵(European Cup), 일명 유에파(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 트로피에 새겨진다.

◇축구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14인 경기 에피스키로스(하르파스톤)

고대 그리스에서 이런 공놀이를 에피스키로스(episkyros), 혹은 파이닌다(phaininda), 때로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고 불렀다. 각각 14명 안팎의 선수로 짜인 두 팀이 경기를 벌이는데, 가운데 요즘의 하프라인에 해당하는 스쿠로스(skuros)라는 흰색 선을 그었다. 흰 선은 각 팀의 뒤에도 있었으니 오늘날 골라인과 같다. 당시에는 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골대를 세우고 망을 걸어 골을 넣는 경기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공을 상대 팀 머리 위로 던지거나 상대 팀 뒤쪽 선까지 보내는 경기였으니 오늘날 럭비와 비슷하다고 할까….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공으로 하는 놀이는 더 있었다. 아포락시스(aporrhaxis)는 공을 튀기는 경기이고, 오우라니아(ourania)는 공을 공중으로 높이 던지는 경기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청년들의 체력단련을 국가적 관심사로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강건한 군인을 양성하는 데 국력을 집중시켰던 스파르타가 더욱 그랬다. 스파르타에서는 1년에 한 번 국가 주도로 5개 팀이 참가하는 에피스키로스 대회를 열어 강력한 체력단련 문화를 고양시킬 정도였다.

▲ 그리스 하르파스톤을 계승한 로마 시대 하르파스툼을 즐기는 여인의 모자이크. 손을 사용해 공중에서 볼을 다룬다. 4세기. 이탈리아 피아차 아르메리나. ⓒ 김문환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파, 손으로 하는 경기, 여성도 즐겨

그리스문화를 그대로 수용했던 로마에도 공놀이 경기가 있었을까? 이탈리아 시칠리아 피아차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로 가보자. 4세기 초 로마의 대형 빌라 유적이자, 이탈리아에 있는 가장 넓은 규모의 바닥 모자이크 명소다. 로마 여인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알록달록한 공을 손으로 치는 장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스 운동장 팔레스트라(palestra)의 공놀이방 스파이리스테리온(sphairisterion)에서 행해지던 공놀이 풍속이 로마에 그대로 전파됐음을 보여준다.

로마로 들어온 시기는 BC 2세기경. 로마에서는 하르파스툼(harpastum)이라고 불렀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아래서 공놀이는 자연스럽게 지중해 전역으로 퍼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 활약했던 이집트 나일 삼각주 도시 나우크라티스 출신 그리스인 아테나이우스(athenaeus)는 로마 시대 공놀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다. 자신도 하르파스툼을 즐기는데, 목이 너무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축구처럼 헤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들고 지속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으로 공을 친 탓이다.

◇12세기 영국서 부활한 공놀이, 19세기 현대축구로 거듭나

로마의 하르파스툼은 영국에서 명맥을 잇는다. 중세가 절정으로 치닫던 12세기 큰 인기를 모은다. 많은 사람이 공놀이에 열중하자 금지령도 나온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으로 1066년 영국을 정복해 현대 영국왕실의 시조가 된 노르만 왕조의 헨리 2세(재위 1152∼1189년)가 그 주인공이다. 이유가 흥미롭다. 전투력 향상으로 연결되는 펜싱이나 활쏘기 대신 전투력과 무관한 공놀이에 열광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였다. 이후에도 경기가 거칠고 패싸움도 자주 일어나자 튜더 왕조 시기인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년) 때 다시 금지령의 철퇴를 맞는다. 곡절 끝에 영국에서 마침내 1862년 축구규칙이 만들어지고, 이듬해인 1863년 영국 축구협회가 결성되면서 현대축구로 거듭 태어난다. 이후 축구는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1904년 파리에서 국제축구연맹(FIFA)이 탄생하고, 1930년 1회 월드컵이 우루과이에서 개최되며 오늘에 이른다.

◇인류사 가장 오래된 2000년 전 한나라 시대 공

축구가 그럼 서양의 전유물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중국 황하 문명의 젖줄, 황하(黃河)의 황토물이 넘실대는 중국 서부 간쑤(甘肅)성의 성도 란저우(蘭州)로 가보자. 간쑤성 박물관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공이 기다린다. 한나라 시대 그것도 서한(西漢) 시기(BC 206년∼AD 8년)의 공이다. 오늘날처럼 바람 넣은 가죽 공을 기대하면 안 된다. 털을 똘똘 뭉쳐 가죽으로 싼 공이다. 한나라 무제 시대 중국은 서역 지방을 개척한다. 불교 석굴사원으로 이름 높은 둔황(敦煌)은 이때 중국 영토로 편입된다.

둔황 마쥐안완(馬圈灣) 지구에서 출토된 이 공의 정체가 이채롭다. 축구(蹴球)가 아닌 축국(蹴鞠)이다. 축(蹴)은 발로 찬다는 의미다. 발(족, 足)에 뛰며 나간다(취, 就)는 의미가 더해진 형성문자다. 국(鞠)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크기의 가죽 공이다. 가죽(혁, 革)에 쌀을 한 움큼 움킬 만큼의 크기(국, 국)가 합쳐진 형성문자다. 그러니까, 오늘날 구(球)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 고대 중국에서는 국(鞠)을 붙인 축구 경기를 즐긴 거다. 사마천이 한나라 무제 때인 BC 108년∼BC 91년 사이 저술한 동양 최초 역사책 ‘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나라 사람들이 축국을 즐겼다고 나온다. 소진이 전국시대(BC 403년∼BC 221년) 인물이므로 중국에서 그리스와 비슷한 시기 축구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간쑤성 박물관에 전시 중인 형태의 공으로 말이다.

◇삼국유사-김유신과 김춘추 축국, 구당서-고구려 축국, 남북통일 축구

그렇다면 앞서 살펴봤던 ‘삼국유사’ 김춘추전의 공놀이도 축국인가? 맞다. 원문을 보자. “蹴鞠于庾信宅前(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했다)” 신라의 공놀이도 중국의 축국이었다. 특기할 것은 부연설명이다. 일연은 “羅人爲蹴鞠爲弄珠之戱(신라 사람들은 축국을 농주놀이라고 부른다)”라고 적는다. 농주(弄珠). 축국을 가리키는 신라만의 고유한 단어였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들어선 5대 10국 시대 3번째 왕조로 석경당이 건국한 후진(後晉, 936∼946년) 때 집필된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을 보자. 고구려에서 “人能蹴鞠(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이라고 기록해 고구려인들이 축구로 드넓은 만주벌판을 달궜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인들이 역시 축구를 즐겼을 수도 있는 평양에서 최근 남북통일 농구대회가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제 평양에서 남북통일 축구 대회도 열릴 수 있을까? 1932년 시작된 서울과 평양의 경평(京平) 축구를 넘어 고구려의 축국 풍속을 계승해 민족문화를 가꾸는 차원에서 말이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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