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강명관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연둣빛 장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품 안에는 어린아이를 안은 여성이 소를 타고 간다. 그 뒤를 아이를 등에 업은 남성이 따른다. 이렇게만 보면 화목한 4인 가족이라고 하겠으나 말을 타고 그 옆을 지나가는 한 남성이 있다. 말에 탄 그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여성을 은근한 눈길로 훔쳐본다. 김홍도의 그림 <길거리에서 남의 아내를 훔쳐보다>이다.

▲ 김홍도의 그림 <길거리에서 남의 아내를 훔쳐보다>는 조선시대 남성의 성적욕망과 시선을 잘 드러낸다. ⓒ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는 이 밖에도 길거리에서 남성이 가족 있는 여성을 훔쳐보는 그림을 여럿 그렸다. 일하는 여성, 지나가는 젊은 여성 등을 엿보는 그림은 셀 수도 없다. 신윤복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오풍정>에는 승려 둘이 목욕하는 반라의 여성을 숨어서 지켜본다. 조선시대 남성이 여성을 훔쳐보는 게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승려마저도.

문제는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선시대 그림들이 한국 사회 여성의 지위를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혜화역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시위가 두 차례 열렸다. 이들이 외친 구호는 “내 일상은 네 포르노가 아니다”였다. 21세기 한국 여성은 ‘시선강간’이나 ‘몰카’에 일상적으로 시달리며 여전히 남성의 성적 욕망 대상이 되고 있다. 훔쳐보는 게 아니라 대놓고 정당하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도 여전하다.

부모의 초상도 그리지 않아 여성, 특히 양반가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은 매우 드물었던 조선시대에 유독 넘쳐나는 여성 그림이 있다. 바로 ‘미인도’다. 여성 신체의 매력을 명백하게 드러낸 미인도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구현한 것이다. 사대부 사이에서는 미인도를 감상하는 풍습까지 있었다. 21세기 미인도는 TV 속 ‘걸그룹’이다. 연예인이란 이유만으로 정당한 성적 관음의 대상이 된다. 성적 매력을 강조한 무대의상, 그리고 무대 아래서 짧은 치마 속을 확대해 찍는 남성 팬들.

조선시대에는 가부장제를 통해 타인의 관음적 시선이 어머니와 아내에게 닿지 않도록 보호했다. 하지만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봤듯이 결혼한 여성이라고 해서 욕망이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 자체는 여전히 여성을 성적 주체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남편의 성적 욕망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된다. 결혼한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성폭행당하는 현실이 존재하는 이유다.

▲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모델이자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박훈 변호사가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벽보를 두고 '개시건방지다'고 표현해 논란이 일었다. ⓒ 신지예

조선시대 그림이 과거 그림으로 남을 수 있도록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 성적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여성이 사회에 등장해야 한다.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포스터가 뜨거운 화제였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와 함께 당당한 미소가 눈에 띄었다. 자애로운 느낌으로 포장하던 기존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21세기에 어울리는 여성의 그림은 가부장제에 종속된 자애로움이 아닌 ‘시건방지다’고 느껴질 만큼 당당한 모습이 아닐까?


편집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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