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살아남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비결

‘고등래퍼2’ 김하온의 스타성

이 미친 스타성은 뭐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순진함과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성숙함을 동시에 갖추다니! 역설적 진리라는 말이 있듯이 모순되는 두 면이 상충하는 사람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얼마 전 종영한 <고등래퍼2> 우승자, 김하온이 그렇다. 명상을 통해 내면의 욕심이나 증오를 비워낸다는 하온은 수상쩍긴 하지만 열아홉 살이다. 힙합에서 노자 <도덕경>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왜 랩을 하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랩의 매력은 무아의 경지로 이끌어준다는 거예요. 제 입으로 뭔가 뱉어내고 있는데 저는 텅 비어 있는 느낌.”

피아니스트가 연주에 그대로 몰입해버리면 건반 위 손가락은 사라지고 선율만 남아 움직인다는 것을, 어찌 그 나이에 무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세상 물정은 모를 수 있지만 세상 이치는 확실하게 깨우친 아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철든 말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장난기 많은 일곱 살 꼬마다. 무대 위에서 다른 친구들이 멋있는 척, 거친 남자인 척 할 때 하온은 <어린 왕자> 노래에 맞춰 앙증맞은 어깨춤을 춘다. 그는 내가 노래를 듣고 그의 인생이 궁금해진, 몇 안 되는 가수다.

▲ <고등래퍼2>에서 하온은 <어린 왕자> 노래에 맞춰 앙증맞은 어깨춤을 춘다. ⓒ <고등래퍼2> 홈페이지

아무리 날라리여도 순수하다

하온뿐 아니라 <고등래퍼2>에 출연한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눈길이 간다. 새로 꾸린 가정에서 태어난 여동생에게 떳떳한 오빠이고 싶다는 열아홉 살 로한, 오도로를 먹을 수 있게 됐지만 그렇다고 우울함의 관성이 삶에서 사라진 건 아니라는 역시 열아홉 살 병재. 근심마저 해맑다. <고등래퍼> 특유의 바이브다. 청소년은 아무리 날라리여도 순수하고 성인은 아무리 모범생이어도 불순하다. 이는 고등학생들이 출연하는 <고등래퍼>와 누구나 출연할 수 있는 <쇼 미 더 머니>를 가르는 지점이다. <쇼 미 더 머니>와 다르게 <고등래퍼>라는 또 하나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안착했음을 뜻한다.

이밖에 랩 경연 프로그램으로 여성 래퍼들이 출연하는 <언프리티 랩스타>도 있다. 전문 래퍼가 아닌 사람이 출연하는 <힙합의 민족>도 있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기원은 2009년 방송된 <슈퍼스타K>이다. <슈퍼스타K>의 지상파 버전인 <위대한 탄생> <K팝 스타> <탑 밴드>부터 어린이 버전인 <위키드>, 아이돌 버전인 <프로듀스101>, <믹스 나인> <더 유닛> 등 아류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뜻밖에 오디션 프로그램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강력한 생명력은 어디서 나올까? 과거에는 플롯 덕분이었다. 초기 오디션 프로그램의 플롯은 장르에서 새로웠다, 경연을 통해 참가자들이 추려지고 최후의 승자만 남는 과정을 통째로 지켜보는 장르는 처음이었으니까. 이번 주에는 누가 경쟁에서 패하고 이 소우주에서 짐을 싸서 떠날까? 이 점은 예측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큰 재미 요소였다. 핵심은 경쟁을 통해 승패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경쟁이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은 굉장히 원초적인 즐거움이다. 경쟁 자체가 갖는 유희적 속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승패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 체내에 남은 원시적인 DNA다. 선사시대 수렵생활에서 추격 끝에 갈리는 생사는 가장 극적으로 갈리는 승패였다. 지금도 미국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방송은 미식축구 결승전과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이다. 경쟁에서 누가 이겼느냐 하는 긴장감 때문이다.

양면적 캐릭터가 경쟁을 통해 선사하는 긴장감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대 과제는 구성상의 긴장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다. 새로 시도하는 프로그램은 긴장감 확보에서 이전 프로그램과 차이점을 두기 위해 경쟁구도를 다양하게 변주시켰다. <나는 가수다>는 일류 가수들끼리 경쟁시키고, <위키드>는 어린 아이들끼리, <프로듀스101>은 아이돌 지망생들끼리 경쟁시켰다. 프로그램마다 서로 다른 참가자들이 출연하니 경쟁 규칙도 완전히 달라졌다.

복제가 거듭되면서 경쟁 플롯도 밑천이 떨어졌다.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어떤 사연을 품은 경쟁인지가 중요해지며 경쟁 플롯 속에 스토리텔링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포착된 것이 캐릭터다. 사연의 주인공이 누구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은 참가자의 캐릭터에 의존한다. 한 참가자의 캐릭터가 다른 참가자의 캐릭터와 만날 때 그 케미 속에서 극적 효과가 강력해진다. 참가자들은 자신만의 캐릭터로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방어적인 시청자를 무장해제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연출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시청자에게 참가자들의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우연히 유입된 시청자로 하여금 경연 참가자들과 특별한 정서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시청자들은 경연에 질렸다지만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에는 어떤 캐릭터의 팬이 돼있다. 프로그램이 결과적으로 남기는 것, 그래서 시청자에게 남는 것은 캐릭터다. 이처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캐릭터가 살아났고, 가장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인 <고등래퍼2>에서 캐릭터 플레이가 꽃피었다. 그 정점에 하온이 있다.

2030들이 취업과정에서 겪는 동병상련

캐릭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철저하게 아는 이들은 2030이다. 채용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지원자는 많고 뽑는 사람은 적다. 수백 명 중에서 내가 선택돼야 한다. 서류전형부터 최종면접까지 합격하려면 자신만의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자기소개서에는 여러 에피소드를 하나로 모았을 때 뚜렷이 그려지는 자신만의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그 캐릭터로 면접에 임한다.

서류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면 대 면에서 내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밋밋한 지원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2030은 1분 자기소개에 쓸 자신만의 키워드를 준비해간다. 자신만의 확고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하온처럼 양면적인 모습을 가진 캐릭터는 취업에서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하온이 캐릭터는 2030취업준비생이 욕망하는 바를 응축하고 있다.

2030은 자신들이 구직현장에서 하온 같은 양면적인 캐릭터를 갖춘다면 합격할 수 있겠다는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것이 2030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채용 과정에서 면접관은 2030에게 정확히 하온 같은 모습을 요구한다. 2030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순수함과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성숙함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 신입다운 패기와 풋풋함이 요구되면서도, 관념과 환상만으로 해당 직종에 지원하는 게 아님을 입증하는 실무적 감각이 요구된다. 20대 중반에 20초반 같은 상큼함과 30초반 같은 노련함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요컨대 청순함과 요염함을 겸비하라는, 아주 까다로운 주문이다.

작년 <고등래퍼> 우승자 영비는 하온과 사뭇 다르다. 영비는 10대 끝자락에서 빨리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는 딱 열아홉 살짜리였다. 방황하고 반항하는 경계인의 캐릭터였다. 영비는 삶이 온통 시행착오인 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모습만 있는 평면적인 캐릭터다. 반면 하온은 시행착오를 겪기 전의 안락한 삶과 시행착오를 끝낸 이후의 평화로운 삶을 오간다. 말하자면 어린이와 성인이라는 양극의 포지션을 널뛰기하듯 오가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이런 까닭에 두 얼굴의 하온은 이른바 면접 프리패스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2030이 하온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서태지, 영비, 하온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대중이 어떤 이에게 지속적으로 욕망을 투사하면 그는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서태지가 그렇다. 그는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일반화하지 않은 장르를 주류와 접목시켰다. 록에 댄스를 가미하고, 힙합에 댄스를 가미했다. 장르만 실험적인 게 아니었다. 아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교실이데아>와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아내려는 의지도 있었다. 노래는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서태지는 제도권 안에 수용된 저항담론이었다. 그는 순응적인 동시에 반항적이었다. 당시는 87년 체제의 영향으로 사회 각계에서 민주화 요구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던 때였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가 충분히 진척되지는 않았기에 검열이 마지막으로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서태지라는 캐릭터는 90년대의 역동적 시대조류와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대중은 그에게 욕망을 투사해 자신의 결핍을 메우고 갈증을 해소했다.

민주주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신자유주의가 들어선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명제는 물신화다. 물신화는 모든 것을, 특히 문화조차도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물신화한 세상에서 사람 자체는 사라지고 잘 팔리는 캐릭터만 소비된다. 인기가 떨어진 상품은 빠르게 다음 상품으로 대체된다. 한 캐릭터가 독자적 생명력을 가지고 오래 사랑을 받기는 어려워졌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수많은 캐릭터들도 한동안 뜨겁게 소비되다 그 에너지가 소진되면 대중에게 버림받는다.

하온은 시대의 징표가 될까? 하온이 서태지처럼 문화 아이콘이 되려면 대중이 자신에게서 욕망을 채우도록 해야 한다. 십년 후 한국사회의 대중은 어떤 캐릭터를 원할까? 인간 소외 사회에서 함께 인간답기 위해 고뇌하고 그 답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캐릭터를 기대하지 않을까? 철학이란 영역은 세속을 알아버린 스물아홉이 고민하기에는 치기 어린 것 같으면서도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아이콘이라면 죽을 때까지 붙잡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소년다움과 성인다움을 겸하는 캐릭터, 하온이라면 스물아홉에 그런 철학적 담론을 대중문화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온이 소비상품이 아니라 시대적 아이콘으로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편집 : 조현아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