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베른 유학시절 김정은의 가상일기

▲ 조현아 PD

“빨간 맛 궁금해 허니.” 나는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남조선예술단의 평양공연 중 으뜸은 레드벨벳의 노래와 안무였다. 비교할 수 없는 외모 때문도 있지만, 그들의 노래 제목이 바로 ‘빨간 맛’ 아닌가? 나는 빨간색을 사랑한다. 자랑스런 북조선의 상징 색이자 정열의 색깔! 15호 관저로 돌아와 책상서랍을 뒤졌다. 구석 끝에서 빨간 색 낡은 수첩을 찾았다.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썼던 일기장이다. 18년 전 소년 시절 일기를 읽어내려 가던 손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 빨간 배경 앞에 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 ABC NEWS

‘2000. 4. 15. 스위스 베른.’

붉은색을 왜 좋아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마 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러하리라. 우방국 소련도 옛날부터 붉은 국기를 썼다. 볼셰비키 혁명 때 흔들던 붉은 깃발과 붉은 광장. ‘빨강’은 영락없는 코뮤니즘(communism)의 상징이다.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한 할아버지, 미국 등 외세에 맞서 자주성을 지킨 아버지, 모두 붉은색과 함께였다.

‘붉은색’은 사실 인민 그 자체다. 그들의 열정과 투쟁이다. 바스티유에서, 파리 코뮌에서, 중국 천안문에서 인민의 역사적 순간마다 위상을 드높인 건 ‘붉은색’이었다. 서구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에 맞서 싸울 때 붉은 장미를 들었다고 했다. 촘촘한 꽃잎은 단결을, 가시는 투쟁을 상징한다. 붉은 잎은 바로 피다. 그래, 진정한 혁명은 ‘피의 투쟁’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리라. 북조선 역시 숱한 이들이 싸운 계급투쟁의 피가 있었기에 탄생했다.

하지만 나는 조국에 또 다른 ‘피’가 있음을 안다. 그것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수많은 처형장에서 흘린 ‘피’다. 정치적 처형은 조국의 체제 존속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불쑥불쑥 의문이 든다. 과연 그들은 꼭 그렇게 피를 흘려야만 했을까?

북조선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인민이다. 인민은 혁명을 추동했고 모든 계급과 차별을 철폐해 진정한 자주성을 실현했다. 당에서도 항상 인민만이 혁명의 ‘주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삶을 진정한 주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주인이라고 하기에 그들의 얼굴은 무기력하고 열없다. 모든 예속과 구속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예속되거나 구속될 만한 소유나 물질이 애당초 없었던 거다. 어쩌면 그들에게 ‘주인’이라는 멍에만 씌우고 있는 건 아닐까? 인민이 주인인데 열심히 쟁기를 끄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은 태양절이다. 늘 그렇듯 붉은 병사들이 열 맞춰 행진을 하겠지. 수많은 인민들은 박수를 치고. 각종 무기와 붉은 깃발, 주석의 사진, 그 거대한 붉음 속에 사실 ‘주인’은 없을 것이다. 당과 체제, 엘리트, ‘대중’이라는 덩어리는 있지만 ‘주인’이라 부를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내가 있는 여기, 스위스의 국기도 붉은색이다. 같은 붉은색이지만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이곳의 붉음은 ‘자유’다. 이곳 사람들은 마음껏 개개인의 욕망을, 취향을, 성격을 발현한다. 투쟁도, 혁명도, 피도 없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모르겠다. 내가 이런 말을 지껄일 처지는 되는 건지… 나는 북조선과 스위스 어느 쪽의 붉음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일 뿐이다. 운 좋게 자본주의 국가에 유학 온 이방인. 나는 붉은색을 좋아하지만, 나의 색은 혁명을 위한 붉음도, 자유의 빨강도 아닌 어중간함에 가깝다. 체제와 인민, 인민과 체제. 이런 복잡한 생각이 들 때면 정남 형님 생각이 난다. 그 역시 이런 고뇌를 하다 결국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의 길을 택했으리라. 투쟁도 자유도 없이 타국을 전전하는 삶. 나는 그가 가깝게 여겨진다.

에릭 클랩튼의 노래나 들어야겠다. 내가 당과 국가, 군대를 이끌 차기 영도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내 위에는 정철 형님이 있다. 나는 조국의 체제를, ‘붉은’ 공화국을 제대로 지켜낼 자신이 없다.

나는 읽던 수첩을 덮었다. 나는 북조선의 국무위원장이자 국방위원장이다. 내 방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은 이제 내게 명확한 의미를 말하고 있다. 나의 북조선에서 붉음이란 쉽게 변할 수 없는 레짐이며, 곧 권력이다. 그 명료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색깔을 두고 “빨간 맛 궁금해 허니”라니. 레드벨벳의 노래를 다시금 떠올리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긴 하다. 남조선 레드벨벳이 부른 ‘빨간 맛’은 어떤 맛일까?


편집 : 안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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