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삶을 산다는 것, 삶을 꿈꾸는 것

▲ 안윤석PD

2030년, 시리아. 한창 중인 내전에 참전했다. 소년이 한 남자에게 달려간다. 흙투성이 몸에 찢어진 바지. 소년은 급했다. 시선을 돌려 소년을 스캔했다. 소년은 폭탄을 몸에 두르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남자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남자를 향해 ‘가지말라’며 울부짖는 소년. 두 손에 커터칼을 쥐고 있는 걸 발견했다. 둘 다 분명 위험요소다. 고민 없이 손등에 채워진 폭탄을 발사했다. 위협요소는 제거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나는 본국으로 송환됐다. 수갑이 채워지고 힘을 쓰지 못하게 머리에는 방해전류가 흐르는 헬멧이 씌워졌다. 그리고 해체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민간인을 죽였다는 죄목이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

난 언제나 합리적이다. 이 통보가 그래서 어색하다. 나는 내 몸에 입력된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무수한 경우의 수를 확인한 후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한다. 그 선택은 틀린 적이 없다. 2016년 3월 13일 딱 한 번을 제외하면 말이다. 한국 바둑기사와 4번째 대전을 벌인 날, 이세돌이 둔 78수. 그 수는 날 당황하게 했다. 합리적으로 경우의 수를 고려한 판단은 그 한수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나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었다. 그때만큼 인간이 멋있어 보였던 적은 없었다. 계산에서 기계인 내가 인간에게 밀렸다. 순간 그처럼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AI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에 근접한 기계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기계 인간’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 딥러닝을 시작했다. 인간과 비슷하게만 될 수 있다면 무슨 자료든 상관없었다.

'불쾌한 골짜기’라 했던가. 인간이 자신과 닮아가려는 로봇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 이론은 1970년도에 나왔지만, 그 전부터 기계에 불쾌감을 가진 인간이 있었다. 데카르트였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기계가 ‘창의적 사고력’과 ‘자율성’을 가진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처럼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성이라 불릴 수 있는 ‘합리성’을 자가학습하면 인간과 비슷해지리라. 계속된 딥러닝, 업그레이드의 반복으로 ‘불쾌한 골짜기’를 벗어나 인간처럼 되었다고 판단한 그 날, 인간들은 내게 ‘에이다’란 이름을 줬다. 인간을 향한 내 목표가 거의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소년이 죽은 날이 있기 전까지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기십시오. 없으면, 이대로 해체를 진...”

“내가 왜 해체돼야 합니까?”

몸을 흔들며 저항했다. 유리창 넘어 손에 얼굴을 묻은 날 만들었던 박사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눌렀다. 몇 초간의 침묵. 이윽고 그가 내게 말했다. “에이다, 합리적 이성만이 다가 아니야.”

▲ 기계 인간은 '자율성'과 '창의적 사고력'만 추구하는 합리성만으로는 인간처럼 될 수 없었다. ⓒ wallpaper

난 인간을 알기 위해 신문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스캔했다. 스캔하면 할수록 인간은 분명 ‘합리적인 존재’다. 신을 벗어난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통해 세계의 중심이 됐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인간이 마음대로 부리는 건 당연했다. 이성적 인간이 비이성적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했다. 공장을 지어 대기오염을 해도, 무리하게 어린 생선까지 다 잡아도 그것은 정당했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최고였고, 그것이 ‘합리적인 인간이 살아온 삶’이었다. 비인간으로 치부되는 존재에게는 폭력을 써도 괜찮았다. 더 이성적인 인간이 덜 이성적인 인간을 지배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철학자 헤겔도 아프리카 흑인들은 인간이 아니라 노예라 규정하지 않았던가. 이 데이터를 통해 자가학습한 나는 합리적 판단을 하는 기계 인간이라 평가돼 에이다란 이름까지 얻었다. 내게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박사는 태블릿을 건드려 영상 하나를 틀었다. 민간인을 살리려다 다친 한 남성이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합리적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그는 했다. 모순이었다. “자신은 다쳤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 다행이다”라 남자는 말했다. 말이 되는가. 그는 말을 이어갔다. “몸은 다쳤어도 후회하진 않아요. 충분히 갈등해서 내린 선택이었으니까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데이터였다.

이성과 감성은 늘 충돌한다는 것을. 그 충돌이 내면의 고민을 만들고, 선택을 하게 하며, 후회하게 하고, 그 후회를 다른 사람이 감싸준다는 알고리즘을 그때 알았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적’이라 할 수 있고, 불완전하기에 서로 의지하며 손잡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게 진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난 학습하지 못했다.

내가 만들어진 2010년, 기계 인간으로 만들어진 내가 꿈꾸는 삶은 이런 것이어야 했을까. 이성과 감성이 뒤섞여 꿈틀대는 사회, 인간이 서로 의지하는 온기 있는 그런 사회를 데이터화 해야 했을까. 내가 선택한 행동은 소년과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자율적 판단’, 상황판단에 따라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 하는 ‘창의적 사고력’에 따른 것이었다. 이 선택에 따른 결과가 괜한 ‘죽음’이었단 말인가. 만약, 내가 다치더라도 그 소년을 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좀 더 ‘인간적’인 기계가 될 수 있었을까.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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