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플라스틱의 눈으로 본 세상
한국이 극심한 갈등사회가 된 것은 자기만 이롭게 하려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발상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좌우, 여야, 노사, 세대, 계층, 지역, 환경 등 서로 간 갈등 국면에는 대개 인간, 특히 강자나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간이 넓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 생각과 풍자가 떠오르는 이는 누구나 글을 보내주세요. 첨삭하고 때로는 내 생각을 보태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봉수 교수) |
“주물하라. 나를 통해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을지니. 외치라, 플라스틱!” 마법의 주문을 알려줄게. 방법은 간단해. 내 이름을 부르면 돼. P-L-A-S-T-I-C. 이상한 사이비 주문 같다고? 아니야. 인간은 플라스틱 세상에서 마법사처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어. 바로 나 만능 플라스틱이 그것을 가능케 하니까.
Plassein이란 그리스 어원처럼, ‘주물하다’ ‘형태를 만들다’가 원래 내 뜻이지. 많은 이들이 ‘플라스틱’ 하면 정형화한 명사, 틀이 있는 물체를 떠올리지만 사실 나는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동사’ 같은 성질이라고. 그 정해지지 않음, 다양한 ‘변신가능성’(plasticity)이 내 특성이지. 폴리에틸렌, 아크릴, 스티로폼… 나는 무궁무진한 재질과 형태로 탄생할 수 있어. 나일론 하나만 해도 그래. 쭉쭉 늘어나는 스타킹으로, 빳빳한 칫솔모로, 까끌까끌한 밸크로 찍찍이로. 인간이 살아가며 접하는 물건 중에 내가 아닌 게 거의 없을 정도니. 어때? 플라스틱 마법이라 할 만하지.
특히 내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일회용품’에서지. 나로 만든 것 중 절반이 일회용품이거든. 아, 그 기원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쟁 물질로 대량 생산되던 나는 전쟁 후 쓰일 곳이 없어졌어. 까딱하면 무용지물이 되게 생긴 거야. 그때 천만다행으로 날 생산하던 기업들은 날 일상생활에 보급했지. 전쟁의 험난함에 맞춰 내구성 있게 제작된 물건들이 평상시 수명 짧은 편의품에 들어오게 됐어. 이를테면 물에 뜨고 절연∙단열 기능이 있는 스티로폼은 해안가 구명보트가 아니라 빛나는 아이스박스로, 고주파를 막는 폴리에틸렌은 샌드위치 용기나 드라이크리닝 비닐로 변했어. 놀랍지 않아? 석유 찌꺼기였던 나한테서 이런 풍부한 가공품이 창출되다니! 일회용의 혁명이라 할밖에.
뭐. 누군가는 나를 비난하기도 하더라. 내가 ‘버리는 문화’를 만들었다면서. 고장이 나도 쉽게 고치거나, 오래 쓰기 어려우니 뭐든지 버리는 습관을 인간에게 심어줬다는 거야. 아니, 근데 그게 뭐 내 잘못인가? 인간 역사상 적은 비용으로 ‘풍부함’을 누리는 게 나쁜 일이던 시기가 있었냐고? 나는 편리하고, 안락하고, 무엇보다 값이 싸며, 무수히 생산할 수 있지. 심지어 쓸 때마다 새것 같은 기분이 드니. 그 소비의 매끈함을 나 말고 누가 줄 수 있겠어? 이미 인간은 나에게 의존하게 됐다고. 그건 해마다 늘어나는 내 생산량이 말해주지. 21세기 첫 10년간 만들어진 내 양이 20세기 전체 생산량과 맞먹을 정도라니까.
이렇게 만능인 나지만, 요즘 들어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자꾸 들려. 전 세계에서 내 사용을 줄이겠다거나 전면 사용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한다는 거야. 날 처리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고, 환경을 오염시킨다나 뭐라나… 특히 시끄러웠던 나라는 한국이야. 아니, 세계에서 나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 인간들이 갑자기 중국에서 재활용 원료로 받지 않겠다니까 난리가 난 거야. 자기네 쓰레기통이 넘치고, 분리수거 할 곳이 없어지니까 그제야 내 사용과 처리에 집중하는 거지. 한 사람이 한 해 420개 비닐봉지를 쓰고, 일회용컵도 하루 7천만개, 연간 257억개를 쓰는 나라가 새삼 왜 난리람? 어휴! 분명 나 없음 제일 불편할 거면서.
사실 큰 걱정은 안 해. 어차피 난 그들보다 훨씬 이 지구에서 오래 살 거 거든! 그들은 나를 봉지로 평균 20분 잠깐 쓰고 버릴지 몰라도, 나는 400년 넘게 버틸 수 있다 이거야. 썩거나 부서지지 않으니까. 인간에게 ‘풍부함’을 제공한 데는 그만큼 값이 있지 않겠어? 이미 나는 지구 곳곳을 점령하고 있지. 땅 속, 바다 속, 그 안의 미세 플라스틱을 먹는 모든 생물들의 뱃속. 내가 없는 곳은 없어. 있잖아, 인간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랬지? 사실 진짜 플라스틱 마법은 뭔지 알아? 이미 그들은 나 없이 못 사는, 신체 일부가 나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플라스틱 인간’이 되었다는 거야, 내가 부리는 마법 때문에. 내가 점령한 세상, 플라스틱 공화국! 그게 내 마법이야.
편집 : 김서윤 기자
단비뉴스 지역농촌부, 미디어콘텐츠부 조현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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