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 ① 이념에 희생된 생존자의 일생

지난 2월 18일 <효리네민박2>에서 이효리는 제주에 살면서도 제주4·3에 관해 “알아야 될 걸 모르고 살았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제주4·3은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미군정의 탄압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민중항쟁이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과거사 문제 해결을 꼽았다. 보수 정권 9년간 제주4·3이 ‘폭동’과 ‘폭도’로 폄훼된 것에 견주면 4·3 해결에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이념 투쟁의 소재로 삼는 4·3 흔들기는 끝나지 않았고 빗나간 보도 행태를 보이는 언론도 있다. <단비뉴스>는 한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4·3으로 찢긴 가슴 속 이야기를 들어보고, 언론 보도의 문제점도 짚어보는 기사를 두 차례 싣는다. (편집자)

봄이 온 제주는 동백꽃과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러 끔찍한 현대사의 현장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복지회관에서 만난 생존자 홍춘호(81·여)씨는 70년 전 11살 때 기억을 어제 일처럼 되살려냈다.

평화로웠던 무등이왓, 불바다 된 사연

“하늘이 벌겅했어(붉었어). 밤에도 하늘이 벌겅했어(붉었어). 토벌대가 불태우는 집들 때문에 제주 하늘이 전부 벌겅했어(붉었어). 우리 아버지가 마을에 가서 보니까 어린아이가 죽은 엄마 젖을 먹고 있는 거야. 아이 엄마는 숨어 있다가 연기 마시고 죽은 거지.“

▲ 4·3을 대중에게 알리느라 힘쓴 강요배 화백의 작품. 당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그렸다. ⓒ 강요배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가 동광리에 들이닥쳤다. 동광리에는 무등이왓(130여 호), 조수궤(10여 호), 사장밧(3호), 간장리(10여 호), 삼밧구석(마전동 45호) 등에 200여 호가 살고 있었다. 5개 부락 중 가장 규모가 큰 무등이왓 마을은 밤새 잿더미가 됐다. 주민들은 팔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당하거나 총살됐다.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내용의 소개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외부 소식을 제대로 전달받기 힘든 중산간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무고하게 희생됐다.

▲ 홍춘호씨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마을을 돌며 학살 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 고하늘

무장대원들이 한라산으로 숨어들자 그들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게 된 토벌대는 무차별 학살을 했다. 중산간마을은 현재 98% 이상 사라진 상태다. 제주도는 사라진 중산간마을을 중심으로 3년 전부터 4·3의 역사 교육과 현장 체험을 활성화하기 위해 제주4·3길을 조성해왔다. 홍춘호씨가 살고 있는 동광리에도 작년 8월부터 4·3길이 생겼다. 그는 지금 제주4·3길 문화해설사로 일한다.

“마을 사람 살려준 착한 경찰도 있어”

지금은 ‘터’만 남아 옛 흔적을 찾기 힘든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은 홍씨가 태어난 곳이다. 무등이왓은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만들던 제주 수공예품 주산지였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 작년 8월 제주4·3길이 조성됐다. 동광리복지회관에서 제주4·3길센터도 함께 운영한다. 제주 동광리 4·3길은 ‘큰넓궤 가는 길’과 ‘무등이왓 가는 길’로 나뉘며 왕복 두 시간이 걸린다. ⓒ 고하늘

“어느 날 순경들이 마을로 찾아와서 연설한다고 나오라 하는 거야,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런데 어떤 순경들은 ‘나오면 죽는다고 나오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오면 죽으니까 이웃집에도 나오지 말라고 하라’고 말하는 거야. 그런 사람 말 들어서 안 나간 사람은 살고, 아침에 어디 간 사람들도 살고, 그런데 집에 있다가 뭣 모르고 나간 사람은 다 죽었어.“

토벌대 작전이 본격 시행되기 전, 10명이 죽은 최초의 학살이었다. 홍씨는 “이후로 청년들이 10명씩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했다”며 “이때부터 토벌대를 피해 숨어 지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밭이나 돌 틈, 굴속에 숨어 살았어. 낮에는 숨고 밤에는 나와서 집에 가서 먹을 것도 구해오고 했지. 어느 날은 순경들이 마을 밖에 잠복해있었어. 숨어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니까 토벌대가 가운데로 (사람들을) 몰아넣어서 죽창으로 다 찔러 죽였어. 총도 안 썼어. 죽창으로 죽이니까 더 고통스럽고 잔인하지. 총은 한 번에 죽는데 죽창은 계속 찌르니까. 한 아기엄마는 칙간(뒷간)으로 굴러 들어가서 살았어. 근데 토벌대가 그 엄마네 아기 엉덩이를 죽창으로 계속 찌르는 거야. 아기 엉덩이가 다 해지도록.”

짐승만도 못한 생활의 연속

▲ 2003년 3월 개봉한 영화 <지슬> 포스터. ⓒ 네이버

토벌대의 학살이 점점 심해지자 이들을 피해 마을 사람들은 큰넓궤(큰 동굴)에 들어가서 살았다. 1948년 겨울,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이 캄캄한 넓궤 안에 몸을 숨겼다. 이 이야기는 훗날 4·3의 아픔과 의미를 국내외에 알린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잃어버린 세월2>의 줄거리가 됐다.

“마을을 떠나서 큰 넓궤로 갔어. 거기 입구가 아주 좁아. 근데 이미 삼밧구석 사람들이 굴속에 다 자리 잡아 살더라고. 우리더러 안쪽으로 들어가서 살라는 거야. 지금 보니까 거기 길이가 180m야. 거기 보면 좁아서 엎드려 기어가야 해. 돌이 울퉁불퉁하니까 앉을 수도 없어.”

큰넓궤 생활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노인들은 밭벼짚을 두드려 새끼를 꼬아 짚신을 만들었다. 동굴 안이 울퉁불퉁해서 하루 한 벌씩 짚신이 끊어졌다. 여자들은 식량을 구하느라 산속을 헤맨 남자들의 찢겨진 무명옷을 꿰매고, 남자들은 밖에 나가 토벌대가 오는지 망보거나 식량을 구해오는 일을 담당했다.

▲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는 실제 동광리에 있는 큰넓궤에서 촬영했다. ⓒ 네이버

“넓궤에 사니깐 연기를 피우지 못해. 밥을 못 해 먹어. 연기가 밖에 나가면 들킬까 봐. 아버지들이 밤에 몰래 나가서 밭에 지슬(감자), 조, 팥, 보리 같은 거 있으면 가져와. 고래(맷돌)에 갈고 헝겊 같은 거에 싸가지고 범벅을 해 먹었어. 그릇도 없으니깐. 이틀에 한 번이나 하루에 한 번 우리한테 가져와. 그거 조금씩 먹고, 물은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걸 받아먹었어. 그런데 그건 짐승의 삶이라. 세수를 한 번 하나, 밖을 한 번 보나,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보나, 옷을 빨아서 입나. 짐승도 그런 짐승이 없어.”

그런 삶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50-60일 버티던 동굴 생활이 토벌대에 발각됐다. 사람들은 넓궤 안으로 토벌대가 들어오자 피신할 때 챙겨온 ‘고추’를 불에 피워 넓궤 밖으로 연기를 내보냈다.

“순경이 연기가 제워서(겨워서) 우리를 잡지 못하고 나가버렸어. 나와서 들어가는 입구를 돌로 막아놓고 가버렸어. 안에 있는 사람들 도망가지 못하게. 다음 날 돌을 치우고 잡으려고 한 거지. 근데 밖에서 망보던 사람들이 토벌대 내려가니까 밤에 그 돌을 다 치워줬어. 사람들이 다 도망갔지.”

‘폭도새끼’ ‘석방쟁이’ 낙인

한라산으로 도망가다 붙잡힌 주민들은 정방폭포 근처에서 총살됐다. 홍씨는 그때 죽은 사람들의 시체도 찾을 수 없어 훗날 칠성판에 망자의 옷가지만 넣고 만든 무덤인 헛묘를 만들어 넋을 기렸다고 전했다. 동광리 육거리의 임문숙 일가 헛묘도 그 중 하나다. 제대로 숨지 못해 혹독한 추위 속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원혼을 위로하려고 만들었다.

▲ 동광리에서 학살된 9명의 헛묘.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큰넓궤에 숨어있던 동광리 주민이 토벌대에 학살됐는데 시신은 바다로 떠내려가거나 겹겹이 쌓여 썩어 있어서 찾을 수 없었다. ⓒ 고하늘

“아버지가 어느 날 종이에 ‘계엄령이 해제됐고 손들고 자수해 오는 사람은 안 죽인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잡히면 다 죽는다. 자수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한 거야. 순경들이 다니면서 막 뿌렸어. 그거 보고 막대기에 흰 헝겊 꽂아서 손 들고 내려갔어. 토벌대는 ‘폭도새끼들 귀순해서 내려온다’고 지꺼졌어(기뻐했어).“

귀순 이후 수용소 생활은 더 힘들었다. 홍씨는 “서귀포 천지연폭포 쪽에 큰 단추공장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단추공장에는 홍씨처럼 남제주군에 살던 이들이 끌려온 경우가 많았고, 부모가 죽고 없는 고아들이 가득했다. 홍씨는 “애기 없는 사람들은 거기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며 “여자는 식모로, 남자는 머슴으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이어 수용소를 전전하던 홍씨는 “이때 일을 가장 잊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저것들 우리 집에 애기 업어가고 습격한 폭도새끼여’ 하면서 욕을 그렇게 하면서. 우리한테 물도 바가지로 던지고, 돌멩이도 던지고 한 거야. ‘자기네 집에 와서 폭도질 하고 뭐 털어간 폭도새끼’라고 하면서. 그 말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밥 먹을 생각이 안 나더라고. 석방이 되고 나서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폭도새끼’라고 집도 안 빌려줬어.”

▲ 제주4·3 때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주민들. ⓒ 네이버

수용소에서 석방된 홍씨의 삶은 어려웠다. 누구랄 것도 없이 먹고 살기 힘든 때였지만 홍씨의 8살, 5살, 2살짜리 남동생 셋이 이 시기에 모두 죽었다. 그때 홍씨는 13살이었다.

1년 뒤 동생이 태어났지만 그해 아버지가 죽었다. 홍씨는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와 자신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세든 주인집에서 쫓겨날까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폭도새끼’라는 낙인 때문에 겨우 구한 집이었지만, 갓난아기가 울어도 안 되고, 배고프지만 밥 냄새를 풍겨도 안 됐다. 억울한 일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동생이 9살 될 무렵 어머니도 죽었다. 이제 어린 동생과 홍씨 둘만 남았다. 홍씨는 결국 4·3으로 집과 부모, 형제를 모두 잃었다.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한 4·3

▲ 제주4·3으로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아픔을 떨쳐내고 밝게 웃는 홍춘호씨. ⓒ 고하늘

홍씨는 슬하에 아들 셋,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도 4·3 이야기를 단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혹시 연좌제에 걸려 자식의 앞날에 문제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특히 군부독재 시절 연좌제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에 4·3의 기억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홍춘호씨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4·3 피해자로 등록하지 않는 이유로 ‘자식’을 꼽았다.

“이제 어버이날 가족들 다 모이면 솔직하게 다 말하려고. 그동안은 내가 말 안 했지. 이제 아이들도 다 크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우리처럼 숨어 살고 징역 살고 한 사람도 우리 동네에는 나밖에 없어. 식물인간처럼 된 사람 아니고서야 나처럼 말할 수 있고 걷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젠 없어.”

“제주 4·3은 현재 진행형”

1999년 말 김대중 정부 때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 때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확정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4·3과 관련해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희생자나 유족에 대한 배상과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2016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 모습. @ 고하늘

“4·3사건 때문에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 너무 억울해. 우리 억울한 사람들 조금이라도 보상해주면 좋겠어. 우리 그런 거 하나도 없어. 천원도 없어. 아예 없어, 아예. 이제 우리 살아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 고생하면서 살아왔는데, 징역살이하고 숨어가면서 살았는데, 보상이라고 한 거는 하나도 없어.”

수용소 생활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홍춘호씨는 생존희생자로 등록되지 못해 지원금이 없다. 제주도청 4·3지원과 강승일 담당자는 “제주4·3을 겪었더라도 누구나 생존희생자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 당시 28만 명 제주도민 모두 4·3 피해자라고 볼 수 있어 외상을 입지 않는 한 피해자 지원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30만 원이던 생존희생자 생활비는 올해부터 50만 원으로 올랐지만 홍씨 같은 피해자는 혜택이 없다.

홍씨는 올해부터 4·3 희생자의 며느리로 등록돼 외래진료 때 본인부담액 30%를 지원받는다. 대략 5000원 정도다. 생존희생자만이 매달 50만 원씩 생활비와 전액 무료 병원비를 지원받는다. 생존희생자의 조건은 후유장애자, 행방불명자, 수형자로 이에 속하지 않은 4·3 피해자의 유족일 경우 75세 이상은 매달 5만 원씩 받거나 홍씨처럼 시아버지가 4·3 희생자인 경우 병원비 일부를 지원받을 뿐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은 크지만, 홍씨가 바라는 보상은 큰 게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이라도 마음 놓고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피해자들의 보상과 배상에 관한 내용이 담긴 4·3 특별법은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고령인 것을 감안하면 개정이 시급하게 이뤄져야 할 상황이지만 국가는 올해 4·3도 그냥 넘길 참이다.


편집 :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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