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국민청원

   
▲ 이창우 기자

“정형식 판사에 대해서 이 판결과 그 동안 판결에 대한 특별 감사를 청원합니다!” 2018년 2월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이다. 서울고법 정형식 부장판사가 이재용 부회장의 2심 재판에서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날이었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은 한 달 안에 20만을 넘으면 청와대의 답변의무가 생긴다. 이 청원이 20만을 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 3일이었다. 언론은 청와대의 답변내용을 ‘청원 내용이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재판에 관여하거나 판사를 징계할 권한은 없다’로 압축했다. 하지만 답변 말미에 ‘사법부라고 해서 수권자인 국민의 비판과 견제에서 무풍지대가 될 순 없다’고 덧붙인 사실을 기사화한 곳은 거의 없었다.

국민들이 삼권분립의 원칙도 모르고 그런 청원을 올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동, 이재용 재판 등으로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는 국민들의 분노 어린 하소연이라는 걸 왜 모르는지. 하긴 언론을 비롯한 한국의 기득권층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정몽주니어’라 불리며 희화화되는 정몽준의 둘째 아들은 “국민이 미개하니 국가도 미개한 것 아니겠느냐”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고 발언해 파면됐다 복직판결을 받은 나향욱 행정관은 영화 <내부자들>을 찢고 나온 듯 했다. 국민을 낮춰 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이다.

▲ 사이먼스가 재현한 ‘고릴라 탈 실험‘. "흰옷을 입은 사람이 몇 번이나 패스했는지 맞춰보라"는 질문을 받은 피실험자들은 쉽게 무주의 맹신 상태에 빠진다. ⓒ 유튜브 갈무리

2004년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는 심리학계에 길이 남을 실험을 선보였다. ‘사람들이 집중할 때는 고릴라 탈을 쓴 사람이 지나가도 이를 인지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선택적 집중 때문에 나머지를 놓치는 이 현상을 ‘부주의 맹시(inattention blindness)’라고 이름 지었다. 한국 기득권층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사표라는 형태로 국민들의 목소리가 전달되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고릴라 탈’에 가깝다. 국민청원제도로 고릴라 탈에 불과했던 국민의 목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인민재판이니 중우정치니 하는 말은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에 다름아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촛불로 새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에게 선물로 돌아온 자그마한 소통 창구다. 불통 정부 9년의 반작용인지, 하루에도 수백 건의 청원이 올라온다. 소소한 생활청원에서부터 시작해 굵직한 개헌 세부제안까지 내용은 다양하다. 크리스토퍼와 사이먼스는 실험 내용을 정리한 저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조언한다. 청와대의 제안을 받아 국회에서 논의할 개헌안에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다. 바보 같은 국민은 없다. 민주주의를 모르는 진짜 바보가 누구인지 따져 볼 시점이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를 놓고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강의를 듣고 한 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도 첨삭 과정을 거쳐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양영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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