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세'

▲ 안형기 기자

동양에서는 세금을 피에 비유하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고전 속 세금은 백성의 기름이나 피와 같다는 의미로 '고혈(膏血)'로 표현되곤 했고, 지금도 '혈세(血稅)'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런 비유와 표현이 흔히 쓰이는 이유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고사가 잘 말해준다.

‘혈세’라는 표현의 유래가 서양이라는 설도 있다. 중세 유럽 오스만제국이 '데브시르메(Devşirme)'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기독교 가정 남자 아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켜 관료, 군인, 성직자 등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때 법 집행을 비인간적으로 강제한 탓에 돈으로 바치는 세금이 아닌 ‘인간 세금’ 곧 ‘블러드 택스(blood tax)’라 불렸다는 것이다.

▲ 중세 유럽 오스만제국에서 '데브시르메(Devşirme)'를 통해 어린이들을 징집하는 장면. 기독교 가정에서 뽑힌 아이들이 빨간 유니폼을 입고서 징집 관리 앞에 정렬해 있다. ⓒ wikipedia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금에는 국민의 땀과 피가 서려 있다는 공통 인식 때문인지 조세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격렬했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여론조사는 매번 국민 3분의 2가 복지확대를 위해 세금을 추가 부담할 의향이 없다고 나온다. 보수는 이 여론을 바탕으로 세금을 덜 걷고 복지 역시 줄이자는 주장에 힘을 빼지 않는다.

여론의 본질은 ‘복지축소’가 아니라 피 같은 내 돈을 별 혜택도 돌아오지 않는 국가에 내기 싫다는 데 있다. 세금이 나라 살림을 충당하는 명분으로 거둔 것이라면 그만큼 공적 혜택을 돌려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평생 내는 세금은 평균 5억원에 이르지만 생활에서 그 만큼의 수혜를 체감하기는 힘들다. 세금이 불공평하게 거두어지고, 엉뚱하게 사용된다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끈질긴 조세저항의 역사는 한번도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복지 혜택도 제대로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복지국가에서 조세저항을 줄이려면 납세의 공평성과 복지혜택의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의 납세자들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느끼며 자주 비교하는 세금이 소득세와 상속세이다. 세무당국은 봉급쟁이에게 유리지갑을 들여다보듯 소득세를 물리면서 재벌에게는 탈세를 눈감아주듯 쥐꼬리만한 상속세를 물린다. 삼성의 이건희와 이재용이 불과 몇 백, 몇 십억원의 상속증여세를 물고 수백조원의 재산과 경영권을 물려받는 작태를 이해할 국민은 거의 없다.

국세청의 ‘과세유형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년간 상속재산은 총 252조원에 이르지만 실제 상속세가 부과된 재산은 83조원 정도이고, 전체 피상속인 273만여명 중 2%도 안 되는 5만여명만 상속세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부에서 우리나라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50%로 미국, 영국, 프랑스보다도 높다고 주장하지만, 각종 공제 혜택 때문에 상속재산 상위 10%의 실효세율은 22.8%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8년 예산안 통과로 과거 정부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깎았던 법인세 최고세율이 다시 원상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반갑지만 기회평등의 조세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속세와 증여세, 종부세 등 재산세 분야에서 대폭 증세가 이뤄져야 한다.

오스만제국의 ‘데브시르메’ 제도는 변방 농촌의 아이들에게 계층상승의 사다리이기도 했다. 자식을 국가에 ‘공납’해야 하는 가족의 심정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각종 교육을 통해 중앙에서 성장하며 귀족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 조세와 복지제도가 공평성과 보편성을 확보해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인간 세금’이라 불리던 ‘데브시르메’보다 나을 게 없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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